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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편 — 모험의 시작
1986~1989
시리즈의 시작, 밝은 모험 코미디의 시대
「드래곤볼」의 첫 번째 막인 소년편은 훗날 우주적 규모의 격투 서사로 팽창하게 될 이 프랜차이즈가 아직 '서유기 오마주에서 출발한 밝은 모험 코미디'였던 시절을 담는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1986년 2월부터 1989년 4월까지 후지TV 계열로 방영한 총 153화, 원작 만화의 첫 194화 분량에 해당하는 이 시기는 파오즈산의 이름 없는 소년이 세계 최강의 무도가로 성장해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유년기 전체를 관통한다. 이야기는 크게 여섯 개의 아크 — 피라후 편, 제21회 천하제일무도회, 레드리본군 편, 제22회 천하제일무도회, 피콜로 대마왕 편, 제23회 천하제일무도회 — 로 이어지며, 각 아크는 이전 아크가 심어둔 씨앗을 회수하고 다음 아크의 씨앗을 심는 유기적 사슬로 짜여 있다.
부르마와의 운명적 만남, 그리고 원초적 대비
발단은 순전히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된다. 파오즈산 깊은 산속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 손오반이 남긴 별 넷 박힌 '사성구(四星球)'를 유품처럼 소중히 간직한 채 혼자 살아가던 꼬리 달린 소년 손오공 앞에, 서쪽 도시에서 온 발명가 소녀 부르마가 자동차를 몰고 나타난다. 부르마는 일곱 개를 모으면 무엇이든 한 가지 소원을 이뤄준다는 전설의 구슬 '드래곤볼'을 찾아 자신이 만든 드래곤 레이더를 들고 여행 중이었고, 오공이 지닌 사성구가 그중 하나임을 알아챈다. 처음엔 오공이 이를 내주지 않으려 하지만, 함께 여행하면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두 사람은 동행하게 된다. 이 첫 만남은 단순한 플롯 장치를 넘어, 순수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야생 소년(오공)과 문명·과학·현실 감각을 대표하는 소녀(부르마)라는, 시리즈 전체를 떠받칠 원초적 대비 구도를 세운다. 부르마가 오공에게 선물하는 드래곤 레이더는 곧 그가 언젠가 다시 할아버지의 사성구를 찾아 나설 것이라는 약속의 매개이자, 사성구=할아버지의 유품이라는 정서적 앵커를 서사에 못 박는 장치다.
동료들의 등장과 피라후 편의 위기
여정에서 두 사람은 거북을 도운 인연으로 색골 노인 무천도사(거북선인)를 만나고, 여자를 밝히는 변신 요괴 돼지 오룡과 사막의 도적 야무치(그의 파트너 고양이 푸알과 함께)를 차례로 동료 혹은 훼방꾼으로 끌어들인다. 특히 야무치는 여성 공포증 때문에 부르마 앞에서 쩔쩔매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이 만남은 훗날 그와 부르마의 연애로 이어지는 복선이 된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이 드래곤볼 일곱 개를 거의 모으지만, 세계 정복을 꿈꾸는 소인배 폭군 피라후 일당(부하 슈, 마이와 함께)이 이를 가로채 신룡을 소환해 '세계 정복'을 빌려 한다. 오룡이 기지를 발휘해 '여자 팬티'를 대신 빌어버리는 개그로 피라후의 소원은 무산되지만, 궁지에 몰린 오공 일행은 피라후에게 감금당한다. 여기서 소년편 최대의 복선이자 시리즈의 근원적 비밀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 보름달을 본 오공이 거대한 원숭이 '오오자루(대원숭이)'로 변신해 성을 초토화하는 것이다. 오공은 할아버지 손오반이 '보름달을 절대 보지 말라'고 당부했고 보름달 밤에 나타나는 괴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그 괴물의 정체가 바로 자기 자신임은 아직 알지 못한다. 이 오오자루 변신과 꼬리라는 설정은 당시엔 그저 신비로운 소년의 이물감으로 소비되지만, 훗날 「Z」에서 오공이 '지구 밖에서 온 사이어인'임이 밝혀질 때 결정적으로 회수되는, 프랜차이즈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긴 복선이 된다.
무천도사의 제자가 되다, 제21회 무도회
첫 모험이 끝난 뒤 오공은 무천도사에게 정식으로 무술을 배우기로 하고, 이 결심이 서사의 축을 '보물찾기 모험'에서 '무술 수행과 강함의 추구'로 전환시킨다. 무천도사는 우유 배달 노동으로 신체를 단련시키는 등 기이하지만 합리적인 수련을 시키고, 이 과정에서 오공은 평생의 벗이 될 승려 지망생 크리링을 만난다. 처음엔 얍삽하고 잔꾀 많던 크리링은 오공과 함께 굴러가며 진정한 동료로 거듭난다. 수련의 성과를 시험하는 무대가 제21회 천하제일무도회다. 오공과 크리링은 이곳에서 부르마·야무치·오룡 등과 재회하고, 자신들의 스승 무천도사가 신분을 감추고 '재키춘'이라는 가명으로 출전한 사실을 모른 채 강적들과 겨룬다. 결승에서 오공과 재키춘(=무천도사)이 격돌하는데, 이는 제자가 자기도 모르게 스승과 맞서는 상징적 대결이다. 재키춘은 아슬아슬한 승부 끝에 승리하지만, 그가 오공을 이긴 진짜 이유는 '제자가 승리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정진하도록 하려는' 스승의 배려였다. 이 무도회에서 오공이 오오자루로 변신하려 하자 재키춘이 강화된 에네르기파(카메하메파)로 달을 아예 파괴해 변신을 막는 장면은, 오오자루의 위험성을 다시 각인시키는 동시에 무천도사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레드리본군과의 격투, 세계급 영웅으로의 도약
무도회가 끝난 뒤 오공은 할아버지의 사성구를 다시 찾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나고, 여기서 소년편의 세 번째 아크인 레드리본군 편이 시작된다. 레드리본군은 드래곤볼을 모아 세계 정복을 노리는 거대 군사 조직으로, 지금까지의 소인배 악당(피라후)과는 차원이 다른 조직적·물리적 위협이다. 오공은 화이트 장군, 블루 장군 등 간부들과 잇달아 싸우며 무스카 요새, 해적 동굴, 얼음 마을 등을 누빈다. 특히 초능력으로 상대를 마비시키는 블루 장군은 오공을 여러 차례 궁지에 몰며 초반의 강적으로 기능한다. 레드리본군의 실패에 분노한 레드 총수는 세계 최고의 암살자 '무살육(桃白白, 타오파이파이)'을 고용하는데, 타오는 등장하자마자 실패한 블루 장군을 손쉽게 죽이며 자신의 잔혹함을 증명하고, 오공을 처음으로 실제로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는다. 타오에게 패해 빈사 상태가 된 오공은 신비로운 카린탑을 오르게 되고, 그곳에서 고양이 신선 카린을 만난다. 카린은 힘을 키워준다는 전설의 '초신수(超神水)'를 두고 오공과 힘겨루기를 시키는데, 이 수행을 통해 오공은 스스로의 한계를 돌파한다. 또한 카린은 상처를 순식간에 낫게 하는 선두콩(仙豆)을 소개하고, 무천도사가 그토록 강해진 비결이 과거 이 카린탑을 올랐기 때문임을 밝히며 세계관의 깊이를 더한다. 강해진 오공은 타오를 쓰러뜨리고, 마침내 레드리본군 본부에 홀로 쳐들어가 조직을 사실상 혼자서 궤멸시킨다. 이 아크는 오공이 '동네 무술가'를 넘어 '세계급 위협에 맞서는 영웅'으로 도약하는 결정적 성장의 무대다.
제22회 무도회, 라이벌 천진반과의 만남
네 번째 아크는 예언자 점술 할멈(바바)의 시련을 거쳐 다시 열리는 제22회 천하제일무도회다. 여기서 오공 앞에 새로운 라이벌 천진반과 그의 벗 교자가 학 신선의 제자로 등장한다. 학 신선은 무천도사(거북선인)의 오랜 숙적으로, 두 유파의 대결 구도가 무도회에 팽팽한 긴장을 부여한다. 오공과 천진반은 결승에서 명승부를 벌이지만, 오공이 아깝게 패한다 — 마지막 순간 링 밖 지면에 먼저 닿은 것이 키가 작은 오공이었기 때문이라는, 신장 차이에서 비롯된 극적인 패배다. 이 패배는 오공에게 '아직 최강이 아니다'라는 자각을 심는 동시에, 처음엔 냉혹했던 천진반이 오공과의 승부를 통해 잔인한 학 신선 문하에서 벗어나 정의로운 동료로 전향하는 계기가 된다. 즉 무도회는 단순한 토너먼트가 아니라, 적을 벗으로 바꾸는 '관계 재편'의 무대라는 시리즈 특유의 문법이 여기서 확립된다.
피콜로 대마왕, 절망의 시대
무도회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 소년편에서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다섯 번째 아크인 피콜로 대마왕 편이 폭발한다. 몰락한 피라후 일당이 우연히 봉인을 풀어버린 피콜로 대마왕은, 아주 오래전 무천도사와 그의 스승 무타이토가 목숨을 걸고 마봉파(魔封波)로 전기밥통 속에 봉인했던 세계 파멸의 존재다. 부활한 피콜로 대마왕은 젊음을 되찾기 위해 드래곤볼을 모아 신룡에게 소원을 빈 뒤, 후환을 없애려 즉시 신룡을 죽여버린다. 이로써 드래곤볼 자체가 소멸하고, '죽으면 되살릴 수 있다'는 안전장치가 사라지면서 서사에 진짜 죽음의 무게가 실린다. 피콜로 대마왕은 자신의 분신들을 풀어 무도가들을 학살하는데, 이 과정에서 크리링, 무천도사, 천진반의 벗 교자 등 오공의 소중한 동료들이 잇달아 살해당한다. 특히 무천도사는 마봉파로 다시 한번 피콜로를 봉인하려다 실패하고 목숨을 잃는다 — 스승의 죽음은 오공을 소년기 최대의 절망과 분노로 몰아넣는다. 절체절명의 오공은 카린탑을 다시 올라 카린의 초신수를 마셔 한계를 넘어서고, 도중에 무뢰한이었다가 동료가 되는 야지로베의 도움을 받는다. 마침내 오공은 피콜로 대마왕과 사투를 벌여 온몸이 부서지는 대가를 치르고 그를 쓰러뜨린다. 그러나 피콜로 대마왕은 죽기 직전 자신의 분신이자 후계자인 알(卵)을 뱉어내,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유지를 남긴다. 이 알에서 태어날 존재가 바로 피콜로 대마왕 2세(마주니어)로, 소년편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종 보스를 예고하는 강력한 복선이다. 한편 죽은 이들을 되살리기 위해 오공은 드래곤볼의 창조주인 '신(神)'을 찾아가는데, 놀랍게도 신은 피콜로 대마왕과 뿌리가 같은 존재였음이 밝혀진다. 오공은 신의 궁전에서 신 및 그의 조수 미스터 포포의 혹독한 수행을 받으며 다음 무도회를 준비한다.
제23회 무도회와 소년편의 완성
소년편의 대미이자 여섯 번째 아크는 제23회 천하제일무도회다. 3년간의 수행을 마친 오공을 비롯해 크리링, 야무치, 천진반, 그리고 어린 시절 오공과 약속을 나눈 소녀 치치가 성장한 모습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여기서 소년편은 두 갈래의 결실을 동시에 맺는다. 하나는 로맨스의 회수다. 오공의 첫 상대로 나선 복면의 참가자 '수수께끼 소녀'가 다름 아닌 우마왕의 딸 치치였고, 오공은 어릴 적 무심코 했던 '결혼 약속(당시 오공은 결혼이 음식인 줄 알았다는 개그가 있었다)'을 뒤늦게 이해하고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다. 다른 하나는 서사적 클라이맥스다. 준결승에서 오공은 신의 수행으로 천진반을 압도적으로 뛰어넘어 승리하고, 결승에서 마침내 피콜로 대마왕의 환생인 마주니어와 맞선다. 이 최종전은 아버지(피콜로 대마왕)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불타는 마주니어와, 세계와 동료를 지키려는 오공의 숙명적 대결로, 링을 초토화하는 격전 끝에 오공이 신승을 거둔다. 오공은 승리 후 마주니어를 죽이는 대신 살려주는데, 이 관용은 훗날 「Z」에서 피콜로가 오공의 아들 손오반의 스승이자 지구의 수호자로 전향하는 거대한 반전의 씨앗이 된다.
제23회 무도회의 우승과 치치와의 결혼으로 소년편, 나아가 원작 「드래곤볼」 애니메이션의 첫 시리즈는 막을 내린다. 이 첫 막은 훗날의 사이어인·프리저·셀·마인부우 같은 우주 규모의 격투 인플레이션과는 결이 다른, 로드무비적 모험, 개그, 무도회 토너먼트가 유기적으로 뒤섞인 '성장담'으로서 완결성을 지닌다. 그러나 동시에 이 막은 이후 전개될 모든 것의 설계도이기도 하다 — 오공의 꼬리와 오오자루 변신은 사이어인 정체성의 복선으로, 마주니어를 살려준 관용은 피콜로의 아군화로, 카메하메파·선두콩·신과 카린 같은 설정은 이후 전투 시스템의 근간으로, 치치와의 결혼은 손오반·손오천으로 이어지는 다음 세대 서사의 출발점으로 각각 회수된다. 밝고 순수했던 소년이 벗을 얻고 스승을 잃고 세계급 악과 싸워 이기며 한 사람의 어른(가장)으로 성장하는 이 첫 번째 막은, 반세기 프랜차이즈의 정서적·설정적 뿌리를 모두 품고 있는 진정한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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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사이어인편 — 우주로 확장된 싸움
1989~1990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 모험에서 우주적 격투로
「소년편」이 소원을 이뤄주는 드래곤볼을 찾아 떠나는 밝은 모험담으로 손오공의 유년과 성장을 그렸다면, 「Z」의 개막을 알리는 사이어인편은 그 세계관을 근본부터 뒤집는 서사적 전환점이다. 원작 만화 17~21권, TV 애니메이션으로는 「드래곤볼 Z」의 첫 시즌에 해당하는 이 막에서, 드래곤볼은 '모험 판타지'에서 '우주적 규모의 격투 서사'로 결정적으로 이행한다. 이야기의 무대가 지구 안의 무술대회와 악당 소탕에서, 멸망한 외계 전사 종족과 우주의 정복 전쟁으로 확장되며, 손오공이라는 인물의 출생 자체가 뿌리째 재정의되기 때문이다.
카카로트의 정체: 사이어인 왕자 라데츠의 폭로
사건의 발단은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의 우주선이다. 성장하여 아내 치치와 결혼하고 어린 아들 손오반을 둔 손오공 앞에, 이상한 갑옷과 스카우터(전투력 측정기)를 착용한 남자 라데츠가 나타난다. 그는 충격적인 진실을 밝힌다. 손오공은 지구인이 아니라, 행성 정복을 생업으로 삼던 호전적 전사 종족 '사이어인'의 일원이며, 라데츠 자신은 손오공의 친형이라는 것이다. 손오공의 본래 이름은 '카카로트'였고, 그는 어릴 적 지구를 초토화하라는 임무를 띠고 보내진 갓난아기였으나, 계곡에서 머리를 크게 다쳐 잔혹한 사명을 잊고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지구인으로 자라났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소년편」에서 손오공이 보름달을 보면 거대 원숭이(오오자루)로 변해 마을을 짓밟고 양아버지 손오반 할아버지를 밟아 죽였던 과거의 미스터리한 사건들이, 이 한 번의 폭로로 모두 '사이어인의 피'라는 인과로 회수된다. 즉 사이어인편은 앞선 장편에 흩뿌려져 있던 복선들 — 원숭이 꼬리, 오오자루 변신, 정체불명의 강함 — 을 하나로 꿰는 거대한 회수의 막이기도 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 손오공과 피콜로의 첫 연합
라데츠는 손오공에게 형제로서 함께 우주의 행성들을 정복하자고 제안하지만, 지구를 사랑하고 평화롭게 살아온 손오공은 단호히 거부한다. 분노한 라데츠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를 과시하며 손오공과, 마침 찾아온 친구 크리링을 단숨에 제압하고, 인질로 어린 손오반을 납치한다. 그는 손오공에게 잔혹한 최후통첩을 남긴다. 24시간 안에 지구인 100명을 죽이지 않으면 아들을 살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막의 첫 번째 극적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손오공을 구하러 온 것은 뜻밖에도 오랜 숙적, 피콜로 대마왕의 분신인 피콜로다. 피콜로 역시 세계 정복의 야망을 품고 있었으나, 라데츠라는 압도적 외부 위협 앞에서는 손오공을 죽여봐야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맹이 되는 이 순간은, 이후 드래곤볼 전체를 관통하는 '숙적의 아군화'라는 서사 문법의 첫 사례이자, 훗날 베지터·피콜로가 정식 동료가 되는 흐름의 원형이 된다.
손오공의 자살 공격과 부활의 시작
손오공과 피콜로는 힘을 합쳐도 라데츠에게 밀린다. 피콜로가 필살기 마관광살포(특공안)를 모으는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손오공은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그는 뒤에서 라데츠를 온몸으로 붙잡아 결박하고, 함께 관통당할 것을 각오한 채 피콜로에게 발사를 명령한다. 마관광살포는 라데츠와 손오공을 동시에 꿰뚫고, 형제는 나란히 절명한다. 주인공이 이야기 초반에 '실제로 죽는다'는 전개는 당시 소년 만화에서 파격이었으며, 이는 드래곤볼이 부활과 죽음을 서사 동력으로 삼는 「Z」의 문법을 선언하는 장면이다. 죽어가던 라데츠는 마지막으로 스카우터가 통신기이기도 함을 이용해, 이 모든 상황이 자신보다 훨씬 강한 두 사이어인 — 사이어인의 왕자 베지터와 거구의 전사 내퍼 — 에게 전해졌고, 그들이 1년 뒤 지구에 온다는 공포를 남기고 숨을 거둔다. 발단의 사건이 곧바로 다음 절정의 예고로 이어지는 구조다.
아들의 숨겨진 잠재력과 1년의 담금질
또 하나 이 막에서 발화한 결정적 복선은 어린 손오반의 잠재력이다. 납치된 손오반은 아버지가 위기에 처하자 극한의 분노 속에서 라데츠에게 예상 밖의 일격을 가한다. 평소 겁 많고 유약한 네 살배기 아이가, 순간적으로 부친을 능가하는 전투력을 폭발시킨 이 장면은 '숨겨진 힘'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 잠재력은 이후 셀편에서 초사이어인 2로의 각성과 세대교체 서사로 크게 회수될, 프랜차이즈 전체에 걸친 최장기 복선의 씨앗이다.
손오공이 죽은 뒤, 이야기는 '1년의 준비 기간'이라는 성장 몽타주로 전환된다. 여기서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담금질된다. 손오공은 저승에서 염라대왕의 허가를 받아, 100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득한 뱀길(스네이크 웨이)을 달려 은하계 북쪽의 무술 신 계왕(카이오)을 찾아간다. 계왕은 농담을 알아듣게 하기, 애완 원숭이 버블스 잡기, 번개처럼 빠른 귀뚜라미 그레고리 망치로 맞추기 같은 기이한 수련을 통해 손오공에게 두 가지 궁극기 — 자신의 기를 폭발적으로 배증시키는 '계왕권'과, 주변 만물의 에너지를 빌려 모으는 '원기옥' — 을 전수한다. 한편 지상에서는 또 하나의 극적 관계 변화가 일어난다. 아무 연고도 없는 손오반을, 다름 아닌 냉혹한 피콜로가 거두어 황야에 던져놓고 야생에서 살아남게 하며 전사로 키운다. 처음엔 임무를 위한 수단으로 소년을 훈련시키던 피콜로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손오반에게 애정을 품게 되는 이 변화는 드래곤볼에서 가장 사랑받는 유대의 시작이다. 크리링·야무치·천진반·초우즈 등 나머지 Z전사들도 신(카미)의 궁전에서 수련하며 다가올 재앙에 대비한다.
내퍼의 학살과 피콜로의 최후: 절망의 극점
1년 뒤,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베지터와 내퍼가 지구에 강림한다. 잔인한 실험이 먼저 벌어진다. 내퍼는 땅에 씨앗을 심어 사이바맨(재배맨)이라는 녹색 병사들을 발아시켜 Z전사들의 실력을 시험한다. 이 전초전에서 야무치가 사이바맨의 자폭 공격에 목숨을 잃는다 — 드래곤볼 팬들에게 오래도록 회자되는 첫 충격적 죽음이다. 크리링과 피콜로가 나머지 사이바맨을 정리하지만, 진짜 학살은 내퍼가 직접 나서면서 시작된다. 내퍼의 압도적 힘 앞에서 천진반은 한쪽 팔을 잃고, 남은 힘을 쥐어짜 기공포(신기공포)를 쏘지만 갑옷조차 제대로 흠집 내지 못한 채 탈진해 죽는다. 그의 절친 초우즈는 내퍼를 끌어안고 최후의 자폭을 감행하지만, 마지막 순간 방어에 성공한 내퍼는 무사히 살아남아 — 초우즈의 희생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비극적 무력감을 남긴다. 그리고 이 막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무거운 죽음이 온다. 내퍼가 손오반을 향해 폭탄 공격(봄버 DX)을 날리는 순간, 피콜로가 몸을 던져 소년 대신 그 일격을 받아낸다. 세계 정복을 꿈꾸던 냉혈한이, 이제는 손오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존재로 변모했음을 죽음으로 증명한 것이다. 더욱이 피콜로의 죽음은 연쇄적 파국을 부른다. 피콜로가 신(카미)과 본디 한 몸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이기에, 피콜로가 죽으면 카미도 함께 죽고 — 카미가 죽으면 지구의 드래곤볼마저 소멸한다. 즉 소생의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지는, 절망의 최심부다.
손오공의 귀환과 내퍼 격파
바로 그 순간, 뱀길을 완주하고 부활한 손오공이 전장에 도착한다. 친구들이 쓰러진 참상을 목도한 그는 분노 속에서, 계왕권으로 강화된 힘으로 내퍼를 손쉽게 압도한다. 손오공은 내퍼의 척추를 꺾어 무력화하고, 임무에 실패한 내퍼를 베지터가 냉혹하게 처형하는 장면은 사이어인 종족의 비정함을 각인시킨다.
손오공 vs 베지터: 계왕권의 한계와 절망의 극복
이어지는 손오공 대 베지터의 일대일 대결은 원작 만화 전체의 하이라이트로 꼽힌다. 손오공은 계왕권 배율을 끌어올리며 맞서지만 왕자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계왕권 3배로도 베지터의 갤릭포(기공포)를 밀어내지 못하고, 마침내 계왕권 4배를 실은 에네르기파(카메하메파)를 쏟아부어야 겨우 상쇄시키는데, 이는 손오공의 육체에 심각한 부담을 남긴다. 궁지에 몰린 손오공은 최후의 카드로 원기옥을 모으지만, 베지터가 이를 견제해 정면으로는 명중이 어려워진다. 결국 크리링이 원기옥을 이어받아 던지고, 손오반의 도움으로 방향을 틀어 베지터에게 명중시키는 팀플레이가 승부를 흔든다.
오오자루 변신과 인과응보: 업보의 순환
그러나 궁지에 몰린 베지터는 인공 보름달(파워볼)을 만들어 스스로 거대 원숭이(오오자루)로 변신한다. 여기서 사이어인편은 이 종족의 근원적 힘이자 저주인 오오자루 변신을 서사의 정점에 배치한다. 이성을 잃고 날뛰던 「소년편」의 오오자루와 달리, 베지터의 오오자루는 자아를 유지한 채 말하고 기공파까지 구사하는 훨씬 위험한 형태다. 오오자루 베지터는 손오공의 뼈를 부러뜨리며 죽음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이때 뜻밖의 조력자가 등장한다. 겁 많은 검객 야지로베가 몰래 접근해 카타나로 베지터의 꼬리를 잘라내 변신을 강제로 해제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서사의 대미를 장식하는 '업보의 아이러니'가 펼쳐진다. 앞서 베지터에게 꼬리가 잘렸던 손오반이, 극한의 압박 속에서 꼬리가 재생되고 남아 있던 파워볼의 빛을 받아 스스로 오오자루로 변신해 베지터를 짓밟는 것이다 — 방금 전 손오공을 능욕하던 오오자루의 힘이, 그대로 베지터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통렬한 인과응보다. 앞서 베지터는 크리링의 기원참(키엔잔)을 단 두 번 보고 흉내 내어 오오자루 손오반의 꼬리를 잘라내며 마지막 반격을 시도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왕자는 더 버티지 못한다.
베지터의 방면과 시리즈의 미래를 여는 선택
결말에서 손오공은,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오만하게 최후를 요구하는 베지터를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낸다. 훗날 더 강해져 다시 겨루고 싶은 좋은 상대로 그를 인정한 이 결정은, 손오공이라는 인물의 '싸움을 즐기는 순수한 무인'으로서의 본질을 드러내는 동시에, 베지터를 처형이 아닌 '숙적'으로 남겨두는 중대한 서사적 선택이다. 이 관용이야말로 이후 베지터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지구를 지키는 동료로 변모해 가는 대서사의 출발점이 된다. 우주선을 타고 도주하는 베지터의 뒷모습으로 이 막은 닫힌다.
사이어인편이 만들어낸 서사적 유산
사이어인편이 전체 서사에서 갖는 의미는 막대하다. 첫째, 이야기의 규모를 지구에서 우주로 확장하며 「Z」 시대의 문법 — 파워 인플레이션, 계왕권 같은 배율형 강화, 원기옥·기원참 같은 신기술,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순환 — 을 모두 정초했다. 둘째, 손오공의 정체를 사이어인으로 재정의함으로써 「소년편」의 여러 미스터리를 회수하는 동시에, 앞으로 등장할 프리저·초사이어인 전설로 이어지는 종족 서사의 초석을 놓았다. 셋째, 손오반의 숨겨진 잠재력과 피콜로와의 유대라는, 프랜차이즈에서 가장 오래 지속될 감정선을 발화시켰다. 넷째, 베지터라는 시리즈 최고의 조연을 처형하지 않고 살려둠으로써, 다음 막인 프리저편으로의 다리 — 죽은 동료들을 되살리기 위해 나메크성의 드래곤볼을 찾아 떠나는 여정 — 를 자연스럽게 놓았다. 실제로 이 막의 직후, 부상당한 손오공을 지상에 남겨둔 채 크리링·손오반·부르마가 피콜로의 우주선을 타고 나메크성으로 향하면서, 이야기는 곧바로 다음 막 「Z 프리저편 — 초사이어인 각성」으로 흘러든다. 즉 사이어인편은 드래곤볼이 국민 만화에서 세계적 격투 서사로 도약하는 문지방이자, 이후 모든 막의 규칙과 인간관계, 그리고 갚아야 할 복선을 한꺼번에 심어놓은 창세기적 전환의 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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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프리저편 — 초사이어인 각성
1990~1991
우주적 규모로 확대된 무대 — 나메크성과 프리저
「드래곤볼 Z」의 두 번째 대형 서사인 프리저편은 앞선 사이어인편이 남긴 상처 위에서 출발한다. 베지터와 내퍼의 지구 침공으로 피콜로·크리링·야무치·천진반·챠오즈가 목숨을 잃었고, 피콜로가 죽으면서 지구의 신룡(神龍) 또한 사라져 지구의 드래곤볼은 기능을 멈춘다. 죽은 동료들을 되살릴 유일한 희망은 피콜로와 신(神)의 고향인 나메크성에 있는 또 하나의 드래곤볼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단숨에 지구를 벗어나 우주적 규모로 확장된다. 사이어인편이 '손오공은 지구인이 아니다'라는 출생의 비밀로 세계관을 뒤흔들었다면, 프리저편은 그 사이어인 종족조차 한때 지배하고 끝내 멸망시킨 '우주의 폭군'을 전면에 세워 이야기의 스케일과 잔혹함의 격을 완전히 새로 정의한다. 애니메이션 기준으로 1990~1991년에 걸쳐 방영된 이 막은 손오공 대 프리저의 대결만으로도 애니메이션 사상 가장 긴 단일 전투로 기록될 만큼 방대하며, 시리즈 전체를 상징하는 '초사이어인'이라는 개념이 최초로 완성되는 결정적 전환점이다.
나메크성의 삼파전 — 지구 진영, 베지터, 프리저
서사의 발단은 지구에서 벌어진다. 베지터와의 사투에서 살아남았지만 중상을 입은 손오공은 병원에 누워 회복을 기다리고, 그를 대신해 크리링·손오반, 그리고 부르마가 나메크성으로 향하는 우주선에 오른다. 이들은 죽은 동료를 살릴 나메크성 드래곤볼을 찾겠다는 순수한 목적으로 출발하지만, 정작 나메크성에 도착해 마주하는 것은 이미 그 별을 침략해 원주민 나메크인들을 학살하며 드래곤볼을 강탈하고 있는 프리저의 군대다. 프리저는 불로불사(不老不死)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드래곤볼을 노리고 있었고, 손오공 일행의 소박한 부활의 여정은 순식간에 우주 최강의 존재와 목숨을 건 쟁탈전으로 뒤바뀐다. 이 도착의 순간이 이 막의 진짜 발단이며, '드래곤볼을 모으는 모험'이라는 초기 시리즈의 골격이 '압도적 강자로부터 살아남는 배틀'로 변모하는 지점이다.
초반 전개의 긴장은 세 진영의 삼파전에서 나온다. 첫째는 크리링·손오반·(뒤늦게 회복해 합류하는) 손오공을 중심으로 한 지구 진영, 둘째는 사이어인편의 패배에서 살아 돌아와 스스로 불사의 소원을 노리며 다시 나메크성에 잠입한 베지터, 셋째는 프리저와 그 부하들이다. 세 진영이 서로를 견제하며 흩어진 드래곤볼 일곱 개를 두고 벌이는 쫓고 쫓기는 두뇌·완력 싸움이 이 막의 전반부를 채운다. 특히 베지터의 위상 변화가 이 시기의 핵심 축이다. 그는 여전히 오만하고 잔혹한 사이어인 왕자이지만, 프리저라는 절대 상위 포식자 앞에서는 그 역시 오랜 세월 공포에 짓눌려 부려지던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진실이 드러난다. 자신의 종족을 멸망시킨 원흉에게 복수하고 그 자리를 빼앗겠다는 야망이, 결과적으로 베지터를 지구 진영과 임시로 손잡게 만든다. 적의 적이 잠정적 아군이 되는 이 불안정한 동맹은 이후 시리즈 내내 이어질 '베지터의 서서히 진행되는 회심'이라는 긴 복선의 출발점이다.
기뉴 특전대의 등장과 손오공의 귀환
중반의 최대 위협은 프리저가 부른 최정예 용병부대 '기뉴 특전대'의 등장이다. 리쿰·버터·자군·구르드, 그리고 대장 기뉴로 구성된 이 다섯 명은 우스꽝스러운 포즈와 단체 안무로 등장하지만, 전투력은 그때까지 지구 진영이 상대한 그 누구보다 압도적이다. 시간을 멈추는 능력의 구르드, 순수한 완력의 리쿰 등이 차례로 크리링·손오반·베지터를 몰아붙이며 절망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이 국면에서 마침내 회복을 마친 손오공이 나메크성에 도착한다. 계왕(界王)의 별에서 익힌 '계왕권'과 새 전투복 차림으로 등장한 손오공은 리쿰을 비롯한 특전대원들을 손쉽게 제압하며, 그동안 절망에 빠져 있던 동료들에게 극적인 반전의 희망을 안긴다. 그러나 대장 기뉴는 격이 다르다. 자신의 열세를 깨달은 기뉴는 자신의 특기인 '바디 체인지'를 발동해 손오공과 육체를 뒤바꿔 버린다. 강력한 손오공의 몸을 얻은 기뉴가 도리어 지구 진영을 위협하고, 손상된 기뉴의 몸에 갇힌 손오공은 제 힘을 낼 수 없는 위기에 처한다. 이 위기를 해소하는 것은 베지터의 냉철함과 손오공의 기지다. 기뉴가 다시 베지터의 몸을 노리고 바디 체인지를 시도하는 순간, 손오공이 나메크성 개구리를 그 궤도에 던져 넣어 기뉴의 정신을 개구리의 몸에 가둬 버린다. 우주 최강 용병대의 대장이 한 마리 개구리로 전락하는 이 결말은, 압도적 강함도 방심과 어리석음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이 시리즈 특유의 아이러니를 상징한다.
부활의 실마리와 피콜로의 극적 재등장
특전대가 정리된 뒤 서사는 두 갈래의 결정적 흐름으로 수렴한다. 하나는 나메크성 드래곤볼로 죽은 동료를 되살리려는 부활의 서사, 다른 하나는 최후의 벽으로 남은 프리저와의 결전이다. 이 과정에서 어린 나메크인 소년 덴데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지닌 덴데는 처음엔 침략자들을 경계하지만, 손오반과 피콜로의 진심에 마음을 돌려 지구 진영을 돕는다. 특히 베지터는 이 치유 능력에 착안해, 스스로 빈사에 이르는 중상을 입은 뒤 회복하는 방식으로 전투력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사이어인 특유의 성질(위기에서 살아남을수록 강해지는 종족 특성)을 활용하려 한다. 한편 나메크성의 최장로 '최장로(그란 장로)'는 손오반과 크리링 안에 잠든 잠재력을 각성시켜 주고, 나메크 드래곤볼로 소환되는 용신 포룽가가 지구의 신룡과 달리 한 번에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부활의 계획에 구체적인 실마리가 생긴다. 이 포룽가의 세 소원이라는 설정은 이후 프리저에게 살해당한 동료들을 되살리는 절정의 장치로 정교하게 회수된다.
절정의 전조는 피콜로의 극적인 부활과 각성이다. 지구에 있던 죽은 피콜로가 포룽가의 소원으로 되살아나 나메크성으로 소환되고, 그 직전 프리저에게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나메크 전사 네일(피콜로와 같은 나메크인 무투파 전사)이 자신의 생명 에너지를 피콜로에게 넘겨 하나로 융합한다. 이 '나메크식 융합'으로 피콜로는 인격을 유지한 채 프리저의 변신 단계에 필적하는 힘을 얻어 전장에 복귀한다. 이는 훗날 시리즈를 상징하게 될 '융합(퓨전)'이라는 개념의 최초 형태이자, 지구인의 아군으로 완전히 돌아선 피콜로의 위상 정립을 알리는 장면이다.
프리저의 변신과 절망의 확대
그러나 이 막의 진정한 악의 정점은 프리저 그 자신이다. 프리저는 이 전투 내내 여러 차례 변신하며 자신의 힘을 단계적으로 드러낸다. 처음의 왜소한 1단계부터 근육질의 2단계, 뿔이 자라난 3단계를 거쳐, 매끈하고 새하얀 '최종 형태'에 이르기까지 변신을 거듭할 때마다 지구 진영과 베지터, 피콜로가 쌓아 올린 희망을 차례로 짓밟는다. 특히 최종 형태에 도달한 프리저 앞에서 베지터는 '자신이야말로 전설의 초사이어인'이라 자부하며 도전하지만 처참하게 무너지고, 죽어가면서 손오공에게 사이어인 종족이 프리저에게 어떻게 짓밟히고 멸망당했는지를 눈물로 토로한다. 오만했던 사이어인 왕자의 첫 눈물과 유언은, 손오공이 단순한 승부가 아니라 종족의 원한과 우주적 폭정에 맞서는 존재로 격상되는 서사적 무게를 부여한다. 이 베지터의 죽음(뒷날 부활한다)은 그의 긴 회심 서사의 결정적 분기점이다.
초사이어인의 각성 — 크리링의 죽음과 변신
손오공과 프리저의 최후 대결은 시리즈 역사에서 가장 긴 단일 전투로 남았다. 손오공은 계왕권을 10배, 20배까지 끌어올리며 저항하고 온 힘을 모은 원기옥(元氣玉)까지 프리저에게 명중시키지만, 프리저는 그마저 견디고 살아남는다. 절망이 극에 달한 순간, 프리저는 손오공의 가장 소중한 벗 크리링을 공중에 띄운 뒤 몸째 폭사시킨다. 초기 시리즈부터 손오공과 함께해 온 가장 오랜 친구의 무참한 죽음은, 그동안 낙천적이고 순수하기만 했던 손오공의 내면에 억눌려 있던 분노를 임계점 너머로 폭발시킨다. 바로 이 순간, 손오공의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금빛으로 물들고 눈동자가 옅은 녹색으로 변하며 황금빛 오라가 온몸을 감싼다. 천 년에 한 번 나타난다는 전설의 존재, '초사이어인'이 마침내 실체가 되어 각성한 것이다. 크리링의 죽음이 방아쇠가 되었다는 점은 이 각성을 단순한 파워업이 아니라 '가장 인간적인 유대와 분노에서 비롯된 힘'으로 만들어, 시리즈의 정서적 핵심을 상징적으로 응축한다.
최후의 결전과 프리저의 패배
초사이어인이 된 손오공은 전세를 완전히 뒤집는다. 압도적이던 프리저는 이제 손오공에게 농락당하는 처지가 되고, 궁지에 몰린 프리저는 별을 파괴해 함께 죽으려 나메크성 핵에 에너지파를 쏘아 넣는다. 그러나 조준이 빗나가 별은 즉시 폭발하지 않고 '앞으로 5분'이라는 시한부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실제 극 중 시간은 이보다 훨씬 길게 이어져 팬들 사이에서 유명한 '5분의 5분' 농담을 남겼다). 프리저가 온 힘을 다한 최종 100% 풀파워까지 개방하며 마지막 발악을 하지만, 이미 격의 우위는 손오공에게 있다. 결국 손오공은 프리저를 압도하고 승리를 눈앞에 두지만, 무익한 살생을 꺼리는 그의 천성 때문에 프리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돌아서려 한다. 그 자비를 배신으로 갚아 프리저가 등 뒤에서 기습하지만, 손오공은 이를 되받아쳐 프리저를 그 자신의 공격으로 절단해 쓰러뜨린다. 이후 손오공은 붕괴하는 나메크성을 가까스로 탈출하고, 지구에 남은 동료들은 드래곤볼로 프리저에게 희생된 이들과 파괴된 별의 사람들을 되살려 낸다. 이로써 부활의 서사와 결전의 서사가 마침내 하나로 매듭지어진다.
프리저편의 역사적 의미와 유산
프리저편이 전체 서사에서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첫째, '초사이어인'이라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최대의 상징이 이 막에서 탄생했다. 이후 등장하는 초사이어인 2·3, 초사이어인 갓, 블루, 나아가 「슈퍼」의 '신(自在極意功)'에 이르기까지 모든 변신 서사가 바로 이 첫 각성의 계보를 잇는다. 둘째, 프리저는 이후 「부활의 F」와 「슈퍼」로 다시 돌아오는 최장수 숙적이 되며, 이 막에서 완결되지 않고 극적으로 목숨만 부지해 미래(사이보그로 부활)로 연결되는 여지를 남긴다. 셋째, 베지터의 죽음과 유언, 피콜로의 융합과 완전한 아군화, 덴데와 나메크인들의 합류는 이후 시리즈의 인물 지형을 새롭게 짜는 초석이 된다. 앞 막인 사이어인편이 던진 '더 강한 적, 더 넓은 우주'라는 질문에 이 막이 '초월적 변신'이라는 답을 내놓았고, 그 답은 곧바로 다음 막인 인조인간·셀편에서 '미래에서 온 트랭크스가 초사이어인이 되어 프리저를 손쉽게 베는' 충격적인 도입부로 이어지며 세대와 시간을 넘나드는 새로운 위협의 서사로 확장된다. 요컨대 프리저편은 「드래곤볼」이 밝은 모험담에서 우주적 배틀 서사시로 완성되는 분기점이자, 이후 모든 후속 이야기가 딛고 서는 정서적·설정적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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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 인조인간·셀편 — 미래에서 온 위협
1992~1994
미래에서 온 타임머신 침입자 트랭크스, 손오공에게 재앙을 경고하다
프리저를 쓰러뜨리고 우주의 폭군 서사가 막을 내린 뒤, 「드래곤볼」은 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꾼다. 앞선 나메크성·프리저편이 '더 강한 적을 찾아 우주 밖으로 나아가는' 확장의 이야기였다면, 인조인간·셀편은 '이미 지나간 과오가 미래를 파괴하고, 그 미래가 현재로 되돌아오는' 시간의 이야기다. 이 막의 발단은 갑작스럽다. 프리저와 그의 아버지 콜드 대왕이 지구를 노리고 찾아오지만, 정체불명의 청년이 순식간에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해 두 부자(父子)를 일방적으로 베어버린다. 이 청년이 바로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트랭크스다. 그는 아직 지구에 도착하지 않은 손오공을 홀로 기다렸다가, 그에게 미래에서 벌어질 재앙을 경고한다. 3년 뒤, 닥터 게로가 만든 인조인간이 나타나 손오공을 제외한 Z전사 대부분을 몰살하고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며, 손오공 자신은 그 전에 원인불명의 심장병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트랭크스는 오공에게 미래의 심장병 치료약을 건네고, 자신이 부르마와 베지터의 아들임을 오공에게만 몰래 밝힌 뒤 다시 미래로 돌아간다. 이 도입부가 이 막 전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 미래는 이미 정해진 최악의 형태로 존재하고, 현재의 인물들은 그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아래 놓인다.
닥터 게로의 출현, 예언된 역사가 어긋나다
예고된 3년이 흐른다. 손오공, 베지터, 피콜로, 크리링, 트랭크스, 손오반 등이 예언된 장소에 모이지만, 정작 나타난 인조인간은 트랭크스가 기억하는 그 인조인간이 아니다. 여기서 이 막의 핵심 긴장이 발생한다 — 트랭크스가 시간을 거슨 순간부터 역사가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고, 미래의 지식이 현재에 그대로 들어맞지 않는다. 처음 등장한 것은 인조인간 19호와, 노인의 모습을 한 20호다. 20호의 정체는 손오공이 소년 시절 궤멸시켰다고 믿었던 레드리본군의 수석 과학자, 닥터 게로 본인이었다. 게로는 늙고 병든 육체를 버리고 스스로를 인조인간으로 개조해 수십 년간 오직 손오공에게 복수하기 위한 병기를 만들어왔던 것이다. 이 설정은 소년편의 레드리본군 에피소드를 수십 년 만에 회수하는 장대한 복선의 결실로, 밝은 소년 모험담이었던 초기 서사가 어떻게 어두운 결과로 되돌아오는지를 보여준다. 예언대로 손오공은 전투 도중 심장병으로 쓰러지고, 트랭크스가 준 약 덕분에 목숨은 건지지만 전선에서 이탈한다. 이때부터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상 손오공의 손을 떠나기 시작한다.
닥터 게로의 최고 걸작, 완전자율의 인조인간 17호와 18호의 각성
게로는 궁지에 몰리자 자신의 연구소로 도망쳐, 봉인해두었던 완성형 병기 17호와 18호를 깨운다. 그러나 이 대목이 이 막의 첫 번째 아이러니다 — 게로가 최고 걸작으로 만든 17호와 18호는 창조주에게 복종하지 않는다. 오히려 17호는 자신을 통제하려는 게로의 목을 잘라 처단하고, 남매는 지구를 파괴하려는 사악한 의도조차 없이 그저 '심심풀이로 손오공을 찾아 죽이겠다'는 유희적 태도로 여행에 나선다. 함께 깨어난 16호는 대조적으로 온화한 거구의 인조인간으로, 오직 손오공 살해라는 명령만을 품고 있으나 새와 자연을 사랑하는 순한 마음의 소유자로 그려진다. 여기서 Z전사들은 프리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절망을 맞는다 — 인조인간은 기력(氣)이 없어 감지되지 않고, 무한한 에너지로 지치지 않으며, 초사이어인이 된 베지터조차 18호에게 팔이 부러지며 완패한다. 강함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처음으로 제시된다.
셀의 출현과 베지터의 치명적 오만, 완전체 셀의 탄생
그러나 진짜 위협은 따로 있었다. 트랭크스가 온 미래와 달리, 이 세계선의 지하에는 게로의 또 다른 궁극병기 '셀'이 자라고 있었다. 셀은 손오공, 베지터, 피콜로, 프리저, 콜드 대왕 등 최강자들의 세포를 조합해 만든 생체 인조인간으로, 자신의 미래에서는 이미 인조인간을 흡수해 완전체가 된 뒤였다. 그 미래의 셀이 그 세계선의 트랭크스를 죽이고 타임머신을 빼앗아 과거로 건너온 것이다 — 즉 셀 또한 시간을 거슬러온 '미래의 침입자'다. 아직 불완전한 형태의 셀은 완전체가 되기 위해 반드시 17호와 18호를 흡수해야 하며, 이를 위해 무고한 인간들을 흡수해 힘을 키우며 남매를 사냥한다. 셀은 마침내 17호를 흡수해 준완전체가 되고, 이 대목에서 베지터가 이 막의 서사를 결정짓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정신과 시간의 방(정신과 시간의 방/초사이어인 훈련실)에서 하루 만에 1년치를 수련하고 나온 베지터는 '슈퍼 베지터'라 불릴 만큼 강해져 준완전체 셀을 압도한다. 오랜만에 맛보는 우월감에 도취된 베지터에게 셀은 절묘하게 속삭인다 — 나를 완전체로 만들어다오, 그래야 네 진짜 힘을 시험할 상대가 된다. 셀은 자신의 몸에 오공과 베지터의 세포가 섞여 있어 사이어인의 자존심과 강자에 대한 갈망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베지터는 그 유혹에 넘어가 18호가 흡수당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트랭크스가 필사적으로 만류하지만 아버지는 듣지 않는다. 결국 셀은 18호마저 흡수해 완전체(퍼펙트 셀)로 각성하고, 베지터의 오만이 부른 파국이 온 지구를 위협하게 된다. 이 막에서 베지터의 자존심은 프리저편의 성장 서사에서 이어지는 캐릭터의 그림자로, 그가 아직 '아버지'도 '동료'도 되지 못한 채 순수한 전투광의 자존심에 갇혀 있음을 드러낸다.
셀게임 개최 선언, 손오공이 아들 손오반에게 세계의 운명을 내건다
완전체 셀은 곧바로 세계를 향해 방송으로 선전포고한다 — 열흘 뒤 '셀게임'이라는 무술대회를 열 테니 최강의 전사들이 자신에게 도전하라, 이기지 못하면 지구를 멸망시키겠다.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한 번 세대교체를 향해 굴러간다. 손오공은 놀랍게도 셀을 이기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짜내는 대신, 아들 손오반의 숨겨진 잠재력에 승부를 건다. 오공은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오반과 함께 수련하되, 초사이어인 상태를 '평상시처럼' 유지하는 여유의 경지에 이르며 오히려 힘을 빼는 법을 택한다. 그는 셀게임 당일, 자신이 먼저 싸워 셀의 실력을 확인한 뒤 스스로 기권하고, 경악하는 모두 앞에서 다음 주자로 아직 소년인 오반을 지목한다. 이는 손오공이 시리즈에서 처음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세계의 운명을 넘기는 순간이며, '항상 최강이던 아버지'라는 자리에서 물러나는 상징적 결단이다.
셀게임의 서막, 미스터 사탄의 우습고 아이러니한 패배
셀게임의 서막은 씁쓸한 코미디로 시작된다. 자칭 세계 챔피언 미스터 사탄(위성)이 큰소리치며 먼저 도전하지만 셀의 손짓 한 번에 나가떨어진다. 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은 훗날 '사탄이 셀을 물리쳤다'는 세상의 오해로 이어져, 진짜 영웅들이 그늘에 숨는 이 세계의 아이러니한 구조를 만든다. 이어 오반이 나서지만, 온순한 소년은 남을 상하게 하는 싸움을 본능적으로 꺼린다. 셀은 오반의 숨은 분노를 끌어내기 위해 자신의 분신인 '셀 주니어' 일곱을 만들어 크리링, 트랭크스, 베지터, 피콜로 등 오반이 아끼는 이들을 잔혹하게 두들긴다. 그럼에도 오반은 각성하지 못한다.
손오반의 각성, 초사이어인을 넘어선 새로운 경지로의 폭발
각성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뜻밖에도 인조인간 16호였다. 셀에게 머리만 남은 채 짓밟히던 16호는 오반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다 — 분노를 두려워하지 마라, 새와 나무와 이 별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은 옳은 일이라고. 그리고 셀은 그 말을 마친 16호의 머리를 발로 짓뭉개버린다. 자연을 사랑하던 순한 인조인간의 죽음, 그리고 벗들이 눈앞에서 짓밟히는 광경 앞에서 오반의 억눌린 힘이 폭발한다. 이 순간 오반은 초사이어인의 한계를 넘어선 새로운 경지 — 훗날 '초사이어인 2'로 불리게 되는 형태로 각성한다(작중 당시에는 명확한 명칭 없이 '초사이어인을 넘어선 힘'으로만 묘사되었다). 각성한 오반은 셀 주니어 일곱을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그토록 무적이던 완전체 셀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인다. 이 각성 장면은 「드래곤볼」을 넘어 소년만화 역사 전체에서 가장 상징적인 변신 장면으로 꼽히며, '아버지에서 아들로'라는 이 막의 주제를 시각적 정점으로 끌어올린다.
최종 결말, 손오공의 희생과 시간의 질문에 대한 답
하지만 절정에는 반전이 남아 있다. 궁지에 몰린 셀은 자폭을 택해 지구째 모두를 없애려 한다. 이때 손오공은 순간이동으로 셀을 계왕성(북쪽 계왕의 별)으로 데려가 함께 폭발함으로써 지구를 구한다 —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히 배턴을 넘긴 뒤, 마지막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셀은 재생능력과 사이어인 세포 덕에 몸의 일부만으로 부활하고, 자폭으로 얻은 세포 기억을 통해 완전체를 넘어선 '초완전체 셀(슈퍼 퍼펙트 셀)'로 되살아나 지구로 돌아온다. 부활한 셀은 방심한 트랭크스를 단 일격에 죽인다. 아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베지터는 — 18호를 흡수하도록 방치했던 바로 그 오만한 사내가 — 처음으로 자존심이 아닌 부성(父性)의 분노에 휩싸여 무모하게 셀에게 달려든다. 이 순간은 베지터라는 인물이 이 막을 거치며 겪은 변화의 씨앗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훗날 마인부우편에서 완성될 그의 '아버지로서의 각성'을 예고하는 복선이 된다. 베지터의 공격은 셀에게 통하지 않지만, 그 틈에 팔을 다친 오반이 남은 한 팔로 카메하메파(에네르기파)를 겨눈다. 마지막 절정은 오반의 카메하메파와 셀의 카메하메파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힘겨루기다. 오반은 한쪽 팔이 부러진 채 밀리기 시작하고, 지구를 부술까 두려워 힘을 온전히 쏟지 못한다. 이때 이미 죽어 저승에 있는 손오공이 텔레파시로 아들에게 말을 건다 — 힘을 아끼지 마라, 부서진 것은 드래곤볼로 되돌릴 수 있다, 지금 네 모든 힘을 쏟아라. 결정적 순간, 베지터가 마지막 기력을 짜내 셀의 뒤통수에 기공포(갤릭포/기습 공격)를 날려 주의를 흩뜨린다 — 자존심의 화신이던 사내가 처음으로 동료의 승리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순간이다. 셀이 흔들린 찰나, 오반은 온 힘을 실은 카메하메파로 셀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무적을 자부하던 셀은 '있을 수 없다'는 절규와 함께 사라지고,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진 세대교체의 서사가 완성된다. 결말은 시리즈 사상 가장 여운이 긴 마무리 중 하나다. 셀에게 죽은 이들은 드래곤볼로 되살아나지만, 손오공만은 부활을 거부한다. 자신이 지구에 있는 한 강한 적들이 그를 노려 계속 재앙을 불러온다는 이유로, 오공은 스스로 저승에 남기를 택한다(단, 16호와 계왕 등 계왕성에서 함께 폭발한 존재들은 되살아나지 못한다). 이는 손오공이라는 무적의 태양이 잠시 무대에서 내려오고, 오반이라는 새로운 주인공에게 세계를 맡기는 상징적 퇴장이다. 이 막의 인물들은 각자의 이유로 전선에서 물러난다 — 오공은 자발적 부재를, 베지터는 오공이라는 목표와 사이어인 왕자의 자존심마저 꺾인 공허함을, 피콜로는 갈수록 치솟는 파워 인플레이션을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를 안고 무대 뒤로 물러난다. 인조인간·셀편은 원래 「드래곤볼」의 완결편으로 구상되었기에, 이 모든 은퇴는 하나의 '끝'으로 설계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이 막은 자신이 던진 시간의 질문에 스스로 답하며 닫힌다. 미래의 트랭크스는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다진 힘과 이번 싸움에서 얻은 경험을 안고 자신의 시대로 돌아가, 그토록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었던 미래의 17호·18호를 마침내 처단하고, 뒤이어 그 세계선의 셀까지 물리쳐 폐허가 된 지구에 평화를 되찾는다. 즉 '이미 정해진 최악의 미래는 바꿀 수 있는가'라는 도입부의 질문에, 이야기는 '바꿀 수 있다'고 답한다 — 다만 그 대가로 손오공은 죽었고, 트랭크스와 오반이라는 다음 세대가 그 짐을 이어받았다. 이렇게 인조인간·셀편은 소년편의 레드리본군 복선을 회수하고, 프리저편의 초사이어인 각성을 '초사이어인 2'로 계승·발전시키며, 세대교체와 희생이라는 새로운 주제를 완결적으로 그려낸다. 그리고 이 막이 남긴 손오공의 부재와 오반이라는 새 주인공, 베지터의 부성 각성이라는 씨앗은 곧이어 봉인에서 풀려난 최강의 마인이 등장하는 다음 막, 마인부우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5
Z 마인부우편 — 최강의 마인과의 결전
1994~1996
평화에서 재앙으로: 천하제일무도회와 부우의 부활
셀 게임으로부터 7년이 흐른 세계에서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앞선 「인조인간·셀편」이 손오공의 죽음과 손오반의 각성으로 '세대교체'라는 화두를 던졌다면, 마인부우편은 그 화두를 정면으로 뒤집으며 '결국 세상을 구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마지막까지 밀어붙인다. 발단은 뜻밖에도 평화로운 일상이다. 셀을 쓰러뜨린 뒤 학자의 길을 걷던 손오반은 사탄시티의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정체를 숨긴 채 '그레이트 사이어맨'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히어로로 활동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미스터 사탄의 딸 비델을 만나 티격태격하다 서로에게 마음을 열어 간다. 한편 저승에 있던 손오공은 하루 동안 이승으로 돌아올 특별한 허가를 받아, 오랜만에 열리는 제25회 천하제일무도회에 참가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손오천과 트랭크스—오공과 베지터의 어린 아들들—이 전면에 등장한다. 죽은 아버지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손오천, 자존심 강한 아버지를 닮은 트랭크스는 주니어부에서 격돌하고, 성인부에서는 7년 만에 오공과 베지터가 재회한다. 이 무도회는 단순한 격투 이벤트가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과 부성(父性), 그리고 곧 닥칠 재앙의 무대장치로 기능한다.
전개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마도사 바비디의 등장이다. 바비디는 아득한 옛날 자신의 아버지 비비디가 만들어낸 궁극의 병기 '마인부우'를 부활시켜 우주를 정복하려는 야망을 품고 지구에 온다. 마인부우는 수천 년 전 수많은 세계를 멸망시키고 셀 수 없는 생명을 학살한 존재이지만, 지나치게 강력하고 통제 불능이었던 탓에 비비디조차 봉인할 수밖에 없었던 재앙이다. 바비디는 부우를 완전히 되살리기 위해 막대한 '기(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오공 일행이 무도회에서 방출한 강대한 힘에 눈독을 들인다. 그의 부하 스포포비치와 얌은 무도회에서 비델을 습격해 오반의 힘을 끌어내고, 바비디 일당은 오공·베지터·오반을 자신들의 지하 우주선으로 유인한다. 여기서 계왕신(카이오신)이 등장해 마인부우의 정체와 위험성을 처음으로 설명하며, 이야기는 다시 한번 '신들의 시선'으로 확장된다.
마인 베지터의 탄생: 욕망의 타락과 자기 허락
이 막의 첫 번째 절정이자 가장 큰 심리 드라마는 '마인 베지터'의 탄생이다. 셀 게임 이후 7년 동안 베지터는 겉으로는 지구에 정착해 부인 부르마, 아들 트랭크스와 가정을 꾸렸지만, 내면에서는 손오공에게 끝내 미치지 못한다는 열등감을 삭이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오공이 셀전에서 초사이어인2에 오른 아들 오반에게 세상을 맡기고 스스로 물러난 사실, 그리고 죽어서도 이승을 방문할 만큼 여전히 강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사이어인의 왕자'라는 그의 자부심을 끊임없이 갉아먹었다. 바비디는 바로 이 마음의 틈을 파고든다. 베지터는 더 강해져 오공을 이기겠다는 욕망 때문에, 스스로 바비디가 자신의 마음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둔다. 이마에 마(魔) 자를 새긴 '마인 베지터'가 된 그는 억눌러 온 잔혹성을 폭발시키며 무도회장을 파괴하고, 기어이 손오공과의 결전을 성사시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지배가 단순한 세뇌가 아니라 베지터 스스로가 '허락한' 타락이라는 점이다. 그는 순수한 전사로서 오공과 겨루기 위해, 자신을 옭아매던 지구에서의 유대와 애정을 잠시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부우의 부활과 유아적 파괴신의 본질
오공과 베지터가 사투를 벌이는 동안, 지하에서는 부우 부활의 카운트다운이 진행된다. 두 사람의 격돌이 쏟아낸 막대한 에너지가 부활의 마지막 연료가 되어, 마침내 봉인이 풀리고 통통하고 순진한 얼굴의 마인부우가 세상에 나온다. 바비디의 부하이자 마계의 왕 다부라는 부우가 결코 바비디에게 복종하지 않으리라 직감하고 그를 견제하려 하지만, 부우의 압도적 힘 앞에 무력하게 당하고 결국 쿠키로 변해 잡아먹힌다. 이 장면은 부우라는 존재의 본질—천진난만함과 무자비함이 종이 한 장 차이로 공존하는 유아적 파괴신—을 각인시키는 복선이다.
오공은 베지터에게 마지막 '개심(改心)'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 세상을 위협하는 부우 앞에서 베지터는 비로소 자신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싸워 온 것이 아님을, 지구와 가족을 위해 싸울 수 있음을 자각한다. 그는 트랭크스를 향해 "태어난 뒤로 한 번도 너를 안아 준 적이 없었다"고 고백하며 아들을 처음으로 끌어안고, 트랭크스와 손오천을 기절시켜 위험에서 떼어 놓은 뒤, 자신의 생명력을 통째로 폭발시키는 '자폭(파이널 익스플로전)'으로 부우를 소멸시키려 한다. 피콜로는 그에게, 오공은 평생 남을 돕고 지켜 온 대가로 육체를 유지한 채 저승에 갔지만, 수많은 생명을 앗은 베지터는 지옥에서 영혼이 정화될 것이라 냉정히 일러 준다. 그럼에도 베지터는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오공이 자신보다 낫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고, 그것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일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이 순간은 베지터 캐릭터 서사 전체의 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 눈물겨운 희생은—부우가 단 하나의 세포로부터 재생하는 존재였기에—허무하게도 무위로 돌아가고, 이야기는 더 깊은 절망으로 내려간다.
부우의 변신과 융합의 시대: 절망에 맞선 응답
부우는 이후 세상을 제멋대로 파괴하다가, 자신을 부린 무능한 주인 바비디마저 죽여 버리고 독립한다. 그러던 그가 세계 챔피언 미스터 사탄과 만나며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꺾인다. 순진한 부우는 사탄과 강아지 '비'와 어울리며 처음으로 '우정'과 '선의'를 배우고,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하지만 부우 안에 잠재된 악(惡)은 사라지지 않았고, 하필 사탄을 노린 인간들의 총격 사건이 방아쇠가 되어, 부우는 남바라제르의 없는 나메크성인처럼 둘로 분열한다. 선량한 통통한 부우와, 가늘고 사악한 회색빛 '이빌부우'로. 그리고 이빌부우가 착한 부우를 흡수하면서, 훨씬 지적이고 '순수한 분노' 그 자체인 근육질의 '슈퍼부우'가 탄생한다. 부우의 이 연속 분열·흡수·변신이야말로 이 막 후반부의 동력이다.
네 번째 물줄기인 '융합(퓨전)의 시대'는 절망에 맞서는 인간 측의 응답이다. 사후세계의 계왕신계에서 오공은 손오천과 트랭크스에게 두 사람이 하나로 합체하는 '퓨전(메타모르 융합술)'을 가르친다. 두 소년이 합체한 '오천크스'는 초사이어인3에 이르는 힘으로 슈퍼부우와 대등하게 겨루지만, 어린아이 특유의 방심과 시간제한 탓에 결정타를 내지 못한다. 한편 늙은 계왕신(노계왕신)은 자신의 남은 수명을 오공에게 넘겨 그를 이승으로 완전히 부활시키고, 봉인되어 있던 오반의 잠재력을 완전히 끌어올려 '얼티밋 오반(궁극의 각성)'을 만들어 낸다. 셀편의 주역이었던 오반은 다시 한번 최강의 비융합 전사로서 부우 앞에 서지만, 슈퍼부우는 오천크스와 피콜로를 먼저 흡수해 힘을 폭증시킨 뒤 오반마저 일방적으로 압도한다. 결정적 장면은 노계왕신이 오공에게 넘긴 귀걸이 '포타라'다. 두 사람이 각각 귀에 차면 영구적으로 하나가 되는 이 포타라를 오공은 오반에게 던지지만, 오반은 이를 받지 못한 채 부우에게 흡수되고 만다. 절체절명의 순간, 이승으로 돌아온 오공은 지옥에서 부활한 베지터와 포타라로 합체해 '베지트'가 된다. 오공과 베지터의 궁극의 융합체 베지트는 슈퍼부우를 압도적으로 농락하지만, 흡수당한 오반·오천·트랭크스·피콜로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부우에게 흡수되는 길을 택하고, 부우의 체내에서 동료들을 하나하나 되찾아 탈출한다. 이때 동료들을 빼앗긴 부우는 봉인 전의 원초적 모습, 즉 야위고 어린 '키드부우'로 퇴행한다—사실 이것이 부우의 본래 형태이며, 순수한 파괴 본능 그 자체인 '악의 화신'이었다.
키드부우와의 최종결전: 지구 전체의 기로 이루어진 승리
마지막 물줄기이자 시리즈 전체의 대미는 키드부우와의 최종결전이다. 오공과 베지터는 계왕신계로 옮겨 가 키드부우와 싸우지만, 순수악 그 자체인 부우는 초사이어인3의 오공조차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는 괴물이었다. 여기서 베지터는 나메크성의 드래곤볼로 아직 소원 하나가 남아 있음을 떠올리고, 덴데를 통해 부우와의 싸움으로 초토화된 지구와 죽은 사람들을 되살리며, 마지막 힘을 짜낸 오공을 위해 그의 체력을 완전히 회복시킨다. 오공은 되살아난 지구인 전원을 향해 손을 들어 힘을 나눠 달라고 외치지만, 정작 그동안 오공이 지켜 온 사람들은 두려움에 응하지 않는다. 절망의 순간, 부우와의 인연으로 목숨을 건진 미스터 사탄이 나서 "챔피언인 내가 부탁한다"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제야 지구 전체의 기가 하늘로 모여 거대한 '원기옥(겐키다마)'을 이룬다. 오공은 이 원기옥으로 키드부우를 완전히 소멸시킨다. 사탄이라는 '싸우지 못하는 인간'이 세계를 구원의 마지막 열쇠가 되는 이 결말은, 이 막이 처음부터 던진 '세상을 구하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자, 힘의 서사로 시작한 시리즈가 도달한 인간적 결론이다.
부우를 소멸시키기 직전 오공은 "언젠가 착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겨뤄 보고 싶다"고 바라고, 저승의 염라대왕이 이 소원을 받아들인다. 착한 통통한 부우는 미스터 부우로서 지구에 남아 사탄, 강아지 비와 평화롭게 살아가고, 이야기는 10년 뒤 제28회 천하제일무도회로 건너뛴다. 그곳에서 오공은 키드부우가 선한 소년으로 환생한 우부를 만나, 그를 지구의 새로운 수호자로 키우기 위해 함께 떠난다. 이렇게 회수되는 복선—숙적조차 환생시켜 새 세대의 희망으로 삼는 마무리—은, 소년편에서 시작해 우주적 대전을 거친 원작 만화 시대의 대장정을 순환과 계승의 이미지로 닫는다. 이 막은 앞선 셀편이 남긴 오반의 각성을 계승하되 그를 다시 뒤로 물리고, 오공과 베지터라는 두 사이어인을 서사의 중심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리고 뒤이어 원작 이후를 그린 「GT」와, 훗날 원작자가 복귀해 그린 신들의 영역·다중우주 시대로 이어지는 모든 후속 서사의 정서적 기준점—희생, 라이벌, 부성, 그리고 평범한 인간의 용기—을 이 마지막 막에 촘촘히 심어 둔다.
6
GT — 오리지널 후일담
1996~1997
GT라는 새로운 후일담
「드래곤볼 GT」는 원작 만화가 마인부우편으로 완결된 뒤,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1996년 2월부터 1997년 11월까지 후지TV에서 전 64화로 방영한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속편이다.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직접 펜을 잡은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 스태프가 이야기를 새로 지어낸 첫 시리즈라는 점에서 앞선 「Z」·소년편과 결정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다만 토리야마는 완전히 손을 뗀 것은 아니어서 'GT'라는 제목을 직접 지었고(그랜드 투어, 즉 온 우주를 순회하는 대여행이라는 뜻이며 자동차 애호가인 그가 즐겨 쓴 표현이기도 하다), 손오공·팡·트랭크스 등 주요 인물의 새 디자인과 초반 콘셉트를 감수했다. 이 막은 그렇게 '원작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 그려낸, 원작과는 결이 다른 별개의 후일담으로 자리한다. 시간적으로는 마인부우와의 결전으로부터 약 10~15년이 흐른 시점에서 시작하며, 오공은 어른이 되어 가정을 이뤘고 손자·손녀 세대가 자라난 평화로운 지구가 무대다.
검은별 드래곤볼의 출현과 어려진 오공
이야기의 출발점은 지극히 아이러니한 소원 하나다. 오랜 세월 오공 일행에게 번번이 당해온 소악당 삼인조 피라후 일당이 신(神)의 궁전에 몰래 숨어들어 그곳에 봉인돼 있던 '궁극의 드래곤볼(검은별 드래곤볼)'을 발견한다. 이 검은별 드래곤볼은 지구의 일반 드래곤볼과 달리, 애초에 나메크성인 카타츠가 지구에 오기 전 만든 원형에 가까운 강력한 물건으로, 소원의 대가가 훨씬 크다. 피라후는 오공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에 무심코 "오공이 다시 꼬맹이였으면 좋겠다"는 식의 말을 내뱉는데, 검은별 드래곤볼에서 나온 용신이 이 말을 곧이곧대로 소원으로 받아들여 어른 손오공을 소년의 몸으로 되돌려버린다. 자신을 도로 강하게 만들고자 친구·가족을 떠나 수행하던 오공은 하루아침에 힘도 몸집도 어린아이로 쪼그라든 채 신세를 한탄하게 된다. 시리즈의 상징이자 최대의 힘이었던 '어른 오공'이 다시 순수한 소년으로 돌아온다는 이 설정은, 소년편의 꼬맹이 오공으로 회귀시켜 원점으로 순환한다는 노스탤지어의 장치인 동시에, 이후 서사 내내 오공이 '작아진 자신'과 씨름하게 만드는 근본 갈등이 된다.
문제는 검은별 드래곤볼이 소원을 이룬 뒤 그냥 잠드는 것이 아니라, 1년 안에 다시 한자리에 모으지 않으면 지구가 폭발한다는 무서운 부작용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소원과 함께 일곱 개의 검은별 드래곤볼이 지구를 벗어나 온 우주 각지의 행성으로 흩어져버린다. 지구의 존망이 걸린 이 시한폭탄을 회수하기 위해 어려진 손오공과, 함께 우주선을 몰 트랭크스, 그리고 오천을 제치고 몰래 우주선에 숨어든 오공의 손녀 팡, 이렇게 세 사람이 우주 대여행에 오르면서 첫 번째 편인 '궁극의 드래곤볼(검은별 드래곤볼) 편'이 본격화된다. 이 대목에서 GT는 「Z」의 우주 규모 배틀에서 잠시 벗어나, 초창기 소년편의 '드래곤볼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는 원형으로 되돌아간다. 낯선 행성들, 기묘한 이종족, 소소한 소동이 이어지는 로드무비풍 전개는 의도적으로 초심의 정서를 소환한다.
우주 여정 속 세 인물의 관계와 성장
이 여정의 축은 세 인물의 대비와 관계 변화다. 손오공은 몸은 어려졌으나 마음과 실력은 여전히 최강의 무투가로, 순수하고 낙천적인 본성은 그대로다. 다만 어려진 몸 탓에 종종 무시당하거나 힘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 놓이며, '작아진 나'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제를 짊어진다. 트랭크스는 어느새 캡슐코퍼레이션의 젊은 사장으로 성장해, 어머니 부르마의 뒤를 이어 우주선과 장비를 책임지는 어른 역할을 맡는다. 소년 전사에서 사회적 책임을 진 청년으로 바뀐 그의 위치는 이 시리즈의 '세대교체' 정서를 대변한다. 가장 극적으로 변한 인물은 팡이다. 손오반의 딸이자 오공의 손녀인 팡은 「Z」 말미의 천진한 어린아이에서, GT에서는 말투가 거칠고 자존심 강하며 삐딱한 소녀로 자라 있다. 사이어인의 피를 이어받아 격투 재능이 뛰어나지만, 어린 나이에 우주의 위험에 뛰어든 탓에 종종 무모하고 감정적이다. 그럼에도 여정을 거치며 할아버지 오공을 향한 깊은 애정과 동료를 지키려는 책임감이 드러나고, 팡은 이 시리즈에서 오공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키는 조력자로서 뚜렷한 성장을 보인다.
베이비의 침략과 초사이어인 4의 각성
두 번째 편이자 GT의 백미로 꼽히는 '복수귀 베이비 편'에서 이야기는 다시 우주적 비극의 무게를 되찾는다. 여정 중 일행은 기계 개조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사악한 과학자 닥터 뮤와, 그가 되살려낸 존재 '베이비'와 맞닥뜨린다. 베이비는 태고에 사이어인에게 멸망당한 종족 '츠플족'의 마지막 생존 의지가 응축된 복수의 화신으로, 닥터 뮤가 기계 뮤턴트로 재건해낸 기생형 생명체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사이어인을 절멸시키고 자신을 만들어낸 츠플족의 원한을 갚는 것이다. 베이비는 액체처럼 몸을 녹여 상처 난 살갗을 통해 상대의 몸속으로 파고들어 숙주를 조종하는 기생 능력을 지녔고, 이 능력으로 지구인들을 차례차례 세뇌해 자신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이 과정에서 GT는 시리즈에서 보기 드문 '몸을 빼앗기는 공포'와 종족 학살의 원죄를 정면으로 다루며, 셀편에 비견되는 호러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베이비 편의 절정은 베지터의 비극이다. 사이어인 왕자로서 가장 강한 숙주를 원한 베이비는 결국 베지터의 몸을 차지해 '베이비 베지터'가 된다. 자존심의 화신이자 오공의 영원한 라이벌 베지터가 원한에 사무친 츠플족에게 육체를 강탈당해 지구 정복의 도구로 전락하는 전개는, 사이어인이 저지른 과거의 죄가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서늘한 인과를 상징한다. 더 나아가 베이비는 사이어인 특유의 힘을 역이용해 황금빛 대원숭이(황금 오오자루)로 변신하고, 겉으로는 이성을 잃은 척 날뛰며 자신을 따르던 세뇌된 부하들을 재미 삼아 학살한 뒤 곧 대원숭이 상태에서도 완전한 이성을 되찾는다. 이 잔혹한 연출은 베이비의 사악함과 지능을 극대화한다. 절체절명의 오공은 계왕신과 노계왕신의 도움으로 어릴 적 잘려나갔던 사이어인의 꼬리를 되찾고, 팡과 계왕신 등이 만들어준 인공 달빛을 받아 스스로 황금 대원숭이로 변신한 뒤, 팡의 필사적인 외침에 힘입어 마침내 이성을 되찾으며 시리즈의 상징적 새 경지인 '초사이어인 4'로 각성한다. 붉은 체모와 야성적 외형을 지닌 초사이어인 4는 GT를 대표하는 변신으로, 아이의 몸에 갇혀 있던 오공을 성인의 모습으로 되돌려주는 힘이기도 하다. 오공은 압도적인 초사이어인 4의 힘으로 베이비 베지터를 몰아붙이고, 10배 에네르기파로 베이비를 태양 속으로 날려보내 소멸시킨다. 다만 승리에도 그림자가 드리운다. 베이비가 검은별 드래곤볼을 가로챘던 탓에 회수 기한을 넘겨 지구가 폭발 위기에 처하고, 오공 일행은 신·피콜로의 희생과 소원으로 사람들을 다른 별로 대피시켜 겨우 지구를 재건한다. 이 대목에서 피콜로가 지구와 운명을 함께해 스스로 소멸을 택하는 장면은 GT의 몇 안 되는 굵직한 이별의 순간이다.
저승의 악당들과 슈퍼 17호
세 번째 편 '초사이어인·궁극의 인조인간(슈퍼 17) 편'은 앞선 「Z」의 유산을 끌어와 매듭짓는 이야기다. 저승(지옥)에 떨어져 있던 두 악의 과학자, 인조인간을 만든 원흉 닥터 게로와 베이비를 만든 닥터 뮤가 손을 잡는다. 뮤는 게로의 설계를 바탕으로 인조인간 17호의 복제체 '헬 파이터 17호'를 만들어내고, 이 복제체가 지상의 원본 17호를 정신적으로 조종해 저승과 이승 사이의 균열을 열게 한다. 이 균열로 프리저, 셀을 비롯해 과거에 쓰러뜨린 악당들이 지옥에서 되살아나 지상으로 쏟아져 나오는 소동이 벌어진다. 원본 17호는 헬 파이터 17호에게 조종당해 여동생 격인 18호마저 세뇌하려 들고, 이를 막아서던 크리링을 격분한 17호가 심장을 꿰뚫는 에너지파로 살해한다. 소년편부터 오공의 가장 오랜 벗이었던 크리링의 죽음은 이 편의 정서적 무게중심이자, GT가 옛 인물들을 소홀히 다뤘다는 비판 속에서도 팬들의 마음을 흔든 장면이다. 조종당한 원본 17호는 결국 복제체와 융합해 강력한 '슈퍼 17호'가 된다. 슈퍼 17호는 상대의 에너지 공격을 모조리 흡수해 무효화하는 반칙적 능력을 지녀, 오공의 10배 에네르기파조차 빨아들이며 그를 궁지에 몰아넣는다. 하지만 흡수와 이동을 동시에 할 수 없다는 약점이 있고, 남편 크리링의 원수를 갚으려는 18호가 결정적 순간에 미끼가 되어 슈퍼 17호의 주의를 흩뜨린다. 그 틈을 파고든 오공이 몸통을 관통하는 '용권(슈퍼 드래곤 피스트)'으로 슈퍼 17호를 관통해 파괴한다. 흥미롭게도 이 강대한 적이 실제로 죽인 인물은 자신을 만든 창조주 게로와 뮤뿐이라는 아이러니가 남는다.
사악룡의 탄생과 최후의 시련
네 번째이자 최종편인 '7마리의 사악룡(그림자 용) 편'은 시리즈 전체, 나아가 「드래곤볼」이라는 대서사의 종막이다. 발단은 극히 상징적이다. 오공 일행이 30여 년간 무수히 소원을 빌며 남용해온 드래곤볼에는, 소원을 이뤄줄 때마다 상응하는 마이너스 에너지가 쌓여왔다. 그 부(負)의 기운이 한계를 넘어 폭발하며 신룡을 낳던 드래곤볼 일곱 개가 산산이 깨지고, 각 구슬에서 인간의 드래곤볼 남용을 심판하려는 일곱 마리의 사악룡이 태어난다. 이는 '소원을 이루는 만능의 도구'라는 시리즈의 근간 소재를 정면으로 되짚어, 편리한 기적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인과응보의 메시지를 결말에 새기는 회수(回收)의 장치다. 오공과 팡은 각지에 흩어진 사악룡들을 하나씩 격파해나가지만, 그중 가장 강하고 사악한 마지막 용 신 신룡(1성룡)이 나머지 여섯 사악룡의 힘과 드래곤볼을 흡수해 최강의 완전체 '오메가 신룡'으로 진화한다.
최종 결전에서 오공은 초사이어인 4로도 오메가 신룡을 당해내지 못한다. 이때 오공의 영원한 라이벌 베지터가 부르마가 개조한 장치의 힘을 빌려 스스로 초사이어인 4에 도달하고, 두 사이어인이 나란히 최강의 형태로 오메가 신룡과 맞선다. 절체절명의 순간 두 사람은 퓨전으로 합체해 '초사이어인 4 오지터(고지터)'가 되어 오메가 신룡을 압도적으로 유린하지만, 지나치게 강대한 힘의 부작용으로 합체 시간이 조기에 풀려버려 결정타를 놓친다. 최후에는 오공이 전 우주와 되살아난 모든 존재의 기운을 그러모아, 시리즈의 상징 기술이자 소년편 이래의 무기인 '초 울트라 원기옥(초 슈퍼 원기옥)'을 완성해 오메가 신룡을 소멸시킨다. 소원의 남용이 낳은 최후의 재앙을, 우주 만물이 마음을 모은 원기옥으로 정화한다는 이 결말은 시리즈가 오래 쌓아온 '기운을 나눈다'는 주제의 완성이기도 하다.
신룡의 선택과 오공의 신화화
오메가 신룡이 사라지자 정화된 본래의 신룡이 나타나 마지막 소원으로 슈퍼 17호와 사악룡들에게 희생된 이들을 되살린다. 그리고 신룡은 그동안 소원을 위해 자신을 너무 오래 써온 대가로 이제 오랜 세월 드래곤볼을 쉬게 해야 한다고 알린 뒤, 놀랍게도 손오공을 데리고 홀연히 떠난다. 오공은 정화된 드래곤볼과 하나가 되어 세상을 지키는 존재가 되고, 남겨진 가족과 동료들은 그를 배웅한다. 이 이별은 소년편에서 꼬맹이 오공이 처음 모험을 떠나던 원점으로 서사를 되돌려 순환을 완성하는 노스탤지어의 정점이자, 오공이라는 영웅을 신화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는 마무리다. 마지막에는 10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노년의 팡이 지켜보는 천하제일무도회에, 오공을 쏙 빼닮은 후손 '손오공 Jr.'가 서 있고 어딘가에서 젊은 모습의 오공이 지켜보는 여운을 남기며 대서사가 막을 내린다.
GT의 위치와 평가
이 막이 「드래곤볼」 전체 서사에서 갖는 의미는 각별하면서도 논쟁적이다. 우선 원작자가 직접 그리지 않은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후일담이라는 점 때문에, 일부 팬은 GT를 정사(正史)에서 벗어난 별개의 세계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GT는 오공에게 지나치게 무게가 실려 크리링·손오반·심지어 베지터 같은 옛 주역들의 비중이 줄었다는 비판, 인상적인 신규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반면 초사이어인 4라는 강렬한 변신, 베이비 편의 종족 학살과 기생이라는 어두운 테마, 크리링의 죽음, 그리고 오공이 다시 소년으로 돌아와 원점을 순환하며 신화가 되는 결말은 GT만의 고유한 정서와 상징으로 오래도록 회자된다. 앞선 마인부우편이 '원작 만화 시대의 완결'이었다면, GT는 그 세계를 애니메이션이 상상으로 이어붙인 '원작 밖의 후일담'으로서 프랜차이즈에 하나의 결말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별개의 결말은 훗날 원작자 토리야마가 직접 참여하는 신극장판기(「신들의 전쟁」·「부활의 F」)와 「드래곤볼 슈퍼」가 등장하며 또 다른 정사의 흐름으로 대체·병존하게 되는데, 그럼으로써 GT는 '원작 밖에서 상상된 또 하나의 미래'라는 독특한 위치를 지닌 막으로 남는다.
7
재편집기 — 改(카이)와 프랜차이즈 정비
2009~2012
완결된 이야기에서 유산으로: 리마스터의 시대로의 전환
이 막은 「드래곤볼」이라는 거대한 서사가 '새 이야기를 쓰는 시대'에서 '이미 완성된 이야기를 다시 손질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시대'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분수령이다. 앞선 다섯 막이 손오공의 소년기부터 사이어인·프리저·인조인간과 셀·마인부우로 이어지는 원작 만화의 절정과 완결을 그린 창작의 시대였다면, 여섯 번째 이 막에는 새로운 적도, 새로운 변신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어떻게 하면 20년 전에 완결된 이 전설을 낡지 않게 되살려 새 관객에게 다시 소개할 것인가'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산업적인 물음이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2009년에 시작된 재편집판 「드래곤볼 改(카이)」였다. 여기서 이야기의 주인공은 손오공이 아니라, 완결된 원작 그 자체와 그것을 다시 매만진 사람들의 손길이다.
원작자의 선택과 산업의 요구가 만난 지점: 재편집의 기획
발단은 상업적 필요에서 비롯된다. TV 애니메이션 「드래곤볼 Z」가 첫 방영 20주년을 맞은 2009년, 이를 기념하려는 움직임이 제작사 토에이 애니메이션 안팎에서 일었다. 이 기획의 씨앗에는 완구·머천다이즈 사업을 이끄는 반다이의 요청이 있었다. 반다이는 프랜차이즈의 상품 매출을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완전히 새로운 드래곤볼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는지를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에게 타진했다. 이 대목이 이 막의 첫 번째 분기점이다. 토리야마는 새로운 이야기를 직접 쓰는 것을 사양했다. 담당 편집자로 오랜 세월 토리야마와 함께해 온 토리시마 카즈히코의 회고에 따르면, 새 이야기를 창작하는 대신 '원작 만화에 더 충실하게 정렬된 「드래곤볼 Z」의 새 버전'을 만드는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고,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잘 풀렸다'고 평했다. 즉 이 막의 성격을 규정하는 근본 동기는, 완결자로서 자기 이야기를 존중하고 새로운 사족을 붙이길 원치 않았던 원작자의 선택과, 프랜차이즈를 되살려야 했던 산업의 요구가 맞물린 지점에서 태어난 '리마스터'였다는 데 있다.
필러의 제거와 원작의 정렬: '改'의 재편집 철학
전개의 핵심은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갈고닦았는가'다. 원래의 「Z」는 원작 만화가 연재되는 중에 이를 따라잡지 않기 위해 방대한 오리지널 필러(원작에 없는 삽입 전개)를 채워 넣었고, 이 때문에 특유의 늘어지는 호흡과 좀처럼 진행되지 않는 전투로 자주 회자되곤 했다. 「改」의 제작진이 한 일은 이 필러의 상당 부분을 걷어내고 이야기를 원작 만화의 흐름에 바짝 붙여 재편집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원작 「Z」가 약 291화에 달했던 것이, 일본 방영 기준 159화(국제판 기준 167화)로 대폭 압축되었다. 단순히 분량만 줄인 것이 아니다. 낡은 필름은 고해상도(HD)로 리마스터되었고, 세월에 손상되거나 오류가 있던 셀 프레임은 새로 그려 덧입혔으며, 새로운 오프닝·엔딩 영상과 새 사운드트랙이 입혀졌다. 무엇보다 대사 음성 전체가 새로 녹음되었다. 이 재녹음에는 원작 당시의 일본 성우진 상당수가 다시 참여해 자신이 20년 전 맡았던 배역의 목소리를 다시 입혔는데, 세월이 흐른 만큼 일부 배역은 교체가 불가피했다. 이렇게 '改(카이)'라는 제목 그 자체가 '고침', '바로잡음', '갱신'을 뜻하는 한자였다는 점은, 이 막 전체가 창작이 아니라 '교정과 개정'의 서사임을 상징적으로 압축한다. 국내 및 국제판에서는 이것이 원작 「Z」의 리마스터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드래곤볼 Z KAI」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높은 시청률과 신세대 관객의 입문: 2009년의 방영 성공
2009년 4월 5일, 「드래곤볼 改」는 일본 후지 TV와 그 계열망을 통해 첫 방영되었다. 방영 시간대는 오전 9시 무렵, 당대의 간판 애니메이션 「원피스」 바로 앞자리였다. 20년 만에 돌아온 손오공은 첫 회부터 11.8%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완결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이 프랜차이즈에 대한 대중의 갈증이 여전함을 증명했다. 이 막에서 이야기가 다시 되풀이하는 사건들 — 손오공의 사이어인 혈통, 라데츠의 침공, 베지터와 프리저와의 사투, 초사이어인 각성, 인조인간과 셀의 위협, 셀 게임에서 손오반의 초사이어인 2 각성으로 이어지는 세대교체 — 은 모두 앞선 막들에서 이미 완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재편집판은 그 사건들을 더 빠르고 밀도 높은 호흡으로 재배열해, 원작을 처음 접하는 신세대 관객에게는 낡지 않은 입문서로, 옛 팬에게는 군더더기 없는 재감상으로 기능했다.
표절 논란과 원점 회귀: 야마모토 켄지 음악의 교체
이 막에는 뜻밖의 위기와 갈등도 존재한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改」의 새 배경음악을 담당한 작곡가 야마모토 켄지다. 그는 리마스터판을 위해 새로 작곡한 사운드트랙을 입혔으나, 그의 곡들이 제3자의 저작권을 침해했다는 표절 의혹이 불거졌다. 이 문제는 이미 2010년 5월경부터 팬들 사이에서 지적되고 있었고, 결국 2011년 3월 9일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야마모토의 음악이 불특정 제3자의 권리를 침해했을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 토에이는 야마모토를 하차시켰고, 그가 작곡한 배경음악을 원작 「드래곤볼 Z」의 음악을 맡았던 원로 작곡가 키쿠치 슌스케의 곡으로 교체했다. 이 교체는 일본 방영 96화 무렵부터 적용되어, 오프닝·엔딩과 아이캐치 음악을 제외한 극중 배경음악이 옛 「Z」의 사운드로 되돌아갔다. 흥미롭게도 이 사건은 리마스터라는 이 막의 성격과 묘하게 겹친다 — '새로 입힌 것'을 걷어내고 '원작의 것'으로 되돌리는 흐름이, 필러를 덜어내 원작에 정렬시킨 재편집의 철학과 공명하듯 반복된 셈이다. 이 소동은 나아가 관련 게임의 리마스터판에까지 파급되어, 야마모토의 음악이 게임 재발매판에서도 교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셀편에서의 중단과 지진의 배경: 미완의 봉인
또 하나의 결정적 사건은 이 막의 방영이 마인부우편에 이르기 전에 한 차례 멈춰 섰다는 점이다. 애초의 「改」는 셀편의 결말(셀 게임)까지 그린 뒤 2011년 3월 27일 97화로 1차 방영을 마쳤다. 원작 최후의 대장정인 마인부우편은 이 시점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상업적·편성적 판단과 함께, 방영 종료 직전인 2011년 3월 발생한 도호쿠 대지진(동일본 대지진)과 그에 따른 방송 편성 혼란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얽혀 있다. 실제로 1차 방영분의 마지막 화였던 98화는 지진 관련 보도 등의 영향으로 정규 방영에 오르지 못하고, 같은 해 8월 2일 일본에서 직판 영상(DTV)으로 별도 공개되는 이례적 경로를 밟았다. 이렇게 이 막의 서사는 '완결까지 다 그리지 못하고 셀편에서 일단 봉인된' 미완의 상태로 봉합된다. 이는 다음 전개를 향한 복선으로 남는다.
프랜차이즈의 주체들: 토리야마, 반다이, 토에이, 성우들의 역할
인물과 관계의 층위에서 보면, 이 막의 '등장인물'은 화면 속 캐릭터가 아니라 프랜차이즈를 둘러싼 주체들이다. 새 이야기를 거부한 원작자 토리야마, 매출 회복을 원한 반다이, 리마스터를 실행한 토에이, 다시 마이크 앞에 선 성우들, 그리고 표절 논란의 중심에 섰던 작곡가까지 — 이들의 선택과 갈등이 실질적으로 이 막의 드라마를 구성한다. 특히 토리야마가 '새 이야기는 쓰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이 선택은 훗날 크게 뒤집힌다. 이 막의 성공이 원작자를 다시 이야기의 세계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국내와 국제 방영: 한국, 미국의 현지화 과정
한국의 맥락에서 이 막은 곧바로 이어졌다. 대원방송 계열의 애니원(Anione)이 2010년 12월 24일 밤 9시부터 「드래곤볼 Z KAI」를 방영하기 시작하며, 국내 시청자에게도 원작에 충실하게 다듬어진 새 버전이 소개되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에서 2010년 5월 24일부터 닉툰스(Nicktoons)를 통해 편집판으로 방영되었는데, 이 방영은 아동 채널의 특성상 상당한 검열을 동반했다. '음담패설' 같은 욕설이 순화되고, '죽음'·'죽이다'·'장례식' 같은 표현이 '파괴'·'격퇴' 등으로 순화되었으며, 더 나아가 일부 방영망에서는 오프닝의 신룡을 지우거나 미스터 포포의 피부색을 파랗게 바꾸는 등 논란이 될 만한 편집이 가해지기도 했다. 이처럼 같은 재편집판이 나라와 방영망에 따라 또 한 번 다르게 '고쳐지는' 현상은, '改'라는 이 막의 주제가 국경을 넘어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었음을 보여준다.
프랜차이즈의 부활과 새 창작으로의 반전: 신극장판과 슈퍼로 향하는 길
이 막이 전체 서사에서 갖는 의미는 '연결과 정비'라는 두 단어로 요약된다. 첫째, 이 막은 90년대에 「드래곤볼」을 보고 자란 세대와 2010년대에 처음 손오공을 접하는 세대를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 낡은 필러를 걷어내고 화질을 끌어올린 이 재편집판은, 완결된 지 오래된 고전이 어떻게 다음 세대의 입문작으로 재탄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모범 사례가 되었다. 둘째,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이 막의 상업적 성공이 프랜차이즈 부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여전히 전 세계에 「드래곤볼」에 대한 거대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改」를 통해 입증되자, 이는 곧 새로운 극장판 제작으로 이어졌다. 오래도록 새 이야기를 쓰지 않겠다던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원안으로 다시 깊이 관여하는 극장판 「신들의 전쟁」과 「부활의 F」,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TV 시리즈 「드래곤볼 슈퍼」로 향하는 길이 바로 이 재편집기의 성공 위에서 열린 것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이 막이 심어 둔 가장 큰 복선의 회수다 — '새 이야기는 없다'며 리마스터로 출발한 시대가, 역설적으로 원작자를 다시 창작의 자리로 불러들이는 반전을 낳았다.
마인부우편의 재편집: '더 파이널 챕터스'와 슈퍼로의 이행
마인부우편으로 향하는 미완의 봉인 역시 훗날 회수된다. 2012년 11월 성우 타나카 마유미가 '드래곤볼 카이의 추가 에피소드를 녹음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속편의 존재가 예고되었고, 2014년 2월 「드래곤볼 Z KAI: 더 파이널 챕터스」라는 이름으로 마인부우편의 재편집이 공식화되어 2014년 4월 6일부터 2015년 6월 28일까지 방영되었다. 이 후반부는 당초 약 69화 분량으로 기획되었으나, 새 TV 시리즈 「드래곤볼 슈퍼」의 2015년 7월 방영 개시에 맞추기 위해 일본 방영본에서는 61화로 다시 편집되었다. 즉 이 막이 셀편에서 잠시 멈춰 세운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이, 프랜차이즈가 완전히 부활해 새 이야기를 시작하는 바로 그 길목에서 완결되며, 재편집의 시대와 신극장판·슈퍼의 시대를 매끄럽게 맞물리게 한 것이다.
완결에서 유산으로, 그리고 재출발로: 이 막의 역사적 의미
요컨대 이 여섯 번째 막은 「드래곤볼」이라는 이야기가 '완결'에서 '유산'으로, 다시 '재출발'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서사다. 앞선 다섯 막이 손오공과 동료들이 목숨을 걸고 쌓아 올린 창작의 절정이었다면, 이 막은 그 절정을 어떻게 보존하고 다듬어 다음 세대에 넘겨줄 것인가를 다룬 '정비의 드라마'다. 새 이야기를 만들지 않겠다는 겸손한 출발이, 리마스터의 성공을 통해 결국 프랜차이즈 전체를 되살리고 원작자를 다시 불러들여 '신들의 영역'이라는 새로운 이야기의 문을 여는 반전으로 이어진 것 — 그것이 이 막이 「드래곤볼」 전체 타임라인에서 차지하는 결정적 위치이자, 다음 막(신극장판기·슈퍼)으로 이어지는 가장 큰 연결 고리다.
8
신극장판기 — 원작자 복귀와 신들의 영역
2013~2015
17년의 공백과 원작자의 각성
「마인부우편」으로 원작 만화가 막을 내린 뒤, 「드래곤볼」은 한동안 극장 신작의 공백기를 맞았다. 1996년 10주년 기념 극장판을 끝으로 무려 17년 동안 손오공은 새로운 스크린 서사를 얻지 못했고, 그 사이 프랜차이즈는 게임·상품·재방영으로 명맥을 유지할 뿐 '이야기의 심장'은 멈춰 있었다. 2009년 할리우드 실사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이 원작을 크게 훼손한 각색으로 혹평받으면서,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는 자신의 세계관이 타인의 손에서 왜곡되는 것을 지켜본 뒤 오히려 '내가 직접 이야기를 다시 쥐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갖게 된다. 이 신극장판기, 즉 「신들의 전쟁(Battle of Gods, 2013)」과 「부활의 F(Resurrection 'F', 2015)」 두 편은 바로 그 각성의 산물이자, 훗날 TV 시리즈 「드래곤볼 슈퍼」로 이어지는 현대 드래곤볼 전체의 초석을 놓은 막이다.
파괴신 비루스의 출현과 신의 영역
첫 작품 「신들의 전쟁」은 원작 만화의 517화와 518화 사이, 즉 마인부우를 쓰러뜨린 뒤 세계에 평화가 찾아온 10년의 시간 안쪽에 위치하는 '정사(正史)'로 설정되었다. 이는 대단히 상징적인 결정이었다. 그동안 극장판들은 대개 본편과 무관한 외전적 오락물로 취급되었으나, 이 작품부터는 원작자가 직접 각본 단계부터 깊이 관여하며 정식 연대기의 일부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발단은 우주의 반대편에서 시작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제7우주의 파괴신 비루스가, 자신의 시종이자 천사인 위스로부터 '지구에서 자란 사이어인 손오공이 우주의 폭군 프리저를 쓰러뜨렸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 것이 방아쇠다. 파괴신 비루스는 나른하고 변덕스러우며 식탐 많은 고양이형 신으로, 창조신에 대비되는 '파괴'의 화신이다. 그는 39년 전 예언어(오라클 피시)가 남긴 '언젠가 그대 앞에 초사이어인 갓이라 불리는 강대한 상대가 나타날 것'이라는 예언을 떠올린다. 잠을 자는 것과 미식(美食), 그리고 강한 적과의 대결에만 흥미를 느끼는 비루스에게 이 예언은 곧 무료한 영겁을 깨울 유일한 자극이었다.
초사이어인 갓의 탄생과 비루스와의 격돌
비루스는 위스와 함께 손오공이 수련하던 계왕성으로 향한다. 손오공은 자신보다 아득히 높은 존재의 격을 눈치채지 못한 채 순진하게도 대결을 청하고, 초사이어인 3까지 변신해 전력을 다하지만 비루스에게 그야말로 손가락 몇 개로 무력하게 제압당한다. 이 장면은 '초사이어인 3=최강'이라는 「드래곤볼 Z」 시대의 힘의 상한선을 단숨에 갈아엎으며, 이제부터 이야기가 '인간·전사'의 층위를 넘어 '신의 영역'으로 진입함을 선언한다. 손오공이 미치지 못하는 벽을 확인한 비루스는 예언 속의 '초사이어인 갓'을 찾아 지구로 향하고, 마침 부르마의 생일 파티가 벌어지던 자리에 불청객으로 등장한다.
여기서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가 세밀하게 교차한다. 자존심 강하기로는 우주 제일인 베지터가, 파괴신의 무시무시한 격을 본능적으로 알아채고는 평소의 오만을 완전히 접은 채 비루스의 비위를 맞추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이 작품 특유의 유머이자, 동시에 비루스라는 존재의 격을 관객에게 각인시키는 장치다. 어린 시절 프리저 밑에서 공포에 떨던 베지터의 트라우마적 처세술이 다시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반면 비루스와 위스는 지구의 음식—특히 푸딩과 각종 요리—에 예상 밖의 호기심을 보이며,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지극히 인간적이고 희극적인 결로 풀어낸다. 그러나 부우가 푸딩을 독차지하는 사소한 소동이 비루스의 분노를 사면서 파티는 파국으로 치닫고, 지구는 순식간에 멸망의 위기에 놓인다.
절정은 '초사이어인 갓'의 탄생이다. 손오공을 비롯한 사이어인들—아들 손오반과 손오천, 그리고 베지터와 그의 아들 트랭크스—이 힘을 하나로 모아 전설의 초사이어인 갓을 만들어내려 하지만 처음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구 음식을 음미하던 위스가 신룡의 말을 재해석해, '다섯 사이어인의 힘이 하나로 흐르려면 순수한 마음을 지닌 여섯 번째 사이어인이 필요하다'는 조건을 간파한다. 마침 부르마가 임신 중이던 딸(브라)이 여섯 번째 사이어인으로 헤아려지면서, 손오공은 붉은 머리칼과 날렵한 몸으로 상징되는 초사이어인 갓으로 각성한다. 신의 격을 얻은 손오공과 비루스의 대결은 지구를 넘어 우주 규모로 펼쳐지지만, 결국 손오공은 다시 한 번 패배한다. 다만 비루스는 그 싸움을 진심으로 즐겼고, 손오공을 '지금껏 자신이 상대한 이 중 두 번째로 강한 자'—첫째는 다름 아닌 스승 위스—라 평하며 지구 파괴를 거둔다. 여기서 위스가 비루스의 시종일 뿐 아니라 그를 무술로 단련시킨 스승이자 더 강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각 파괴신을 감독·양성하는 천사라는 설정이 제시된다. 토리야마가 매긴 파워 밸런스—초사이어인 갓 손오공을 6, 파괴신 비루스를 10, 천사 위스를 15로 둔 저 유명한 수치—는 이 막이 향후 '신들의 위계'라는 새로운 힘의 좌표계를 열었음을 압축한다.
프리저의 부활과 수련을 통한 변화
두 번째 작품 「부활의 F」는 이 신들의 영역이라는 무대 위에서, 「드래곤볼 Z」 최고의 숙적이자 원점이라 할 프리저를 부활시켜 '과거와의 정산'을 시도한다. 이 작품은 토리야마가 각본을 직접 집필했다는 점에서 「신들의 전쟁」보다도 원작자의 지문이 더 짙게 배어 있으며, 그만큼 정사로서의 무게도 크다. 이야기는 프리저 군의 잔당 사령관 소르베가, 무너진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우두머리 프리저를 되살리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소르베 일당은 지구로 잠입해 필라프 일당을 협박, 드래곤볼을 모아 신룡을 소환한다. 문제는 프리저가 과거 미래의 트랭크스에게 검으로 산산조각 나 죽었던 탓에 그 육신이 무수한 조각으로 되살아났다는 점이며, 소르베의 부하들은 첨단 기술로 그 조각들을 짜맞춰 폭군을 완전히 복원한다.
부활한 프리저는 되살아나자마자 무능한 부하들을 학대하며,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이어인들에 대한 복수를 벼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프리저는 이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선택을 한다. 손오공이 자신을 훨씬 능가할 만큼 성장했음을 전해 듣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련'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만으로 우주를 지배해 온 프리저가 자존심을 굽혀 4개월간 훈련에 매진한다는 설정은, 그의 오만한 캐릭터에 '집념'이라는 새로운 결을 부여하며 복수극에 개연성을 실어준다. 그 결과 프리저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어 지구로 쳐들어온다.
남겨진 전사들의 저항과 절체절명의 위기
이 시점에서 인물 배치가 절묘하게 갈린다. 손오공과 베지터는 비루스의 행성에서 위스에게 사사받으며 신의 영역을 향한 수련에 몰두하느라 지구를 비운 상태다. 이 공백이 극의 긴장을 만든다. 프리저의 침공 앞에서 지구를 지키는 것은 손오반, 피콜로, 크리링, 무천도사, 천진반, 그리고 은하 순찰자 자코 등 '남겨진 전사들'이다. 이들은 소르베가 이끄는 천 명 규모의 프리저 군단에 맞서 처절하게 싸워 이들을 격퇴한다. 손오반이 시사미를, 피콜로와 크리링, 천진반, 무천도사가 각자의 몫을 감당하며 옛 동료들의 저력을 보여주지만, 프리저는 실패의 대가로 소르베를 제외한 전군을 스스로 몰살시키는 냉혹함을 드러낸다. 위기의 순간, 위스의 감지로 사태를 파악한 손오공과 베지터가 지구로 귀환하면서 국면이 전환된다.
초사이어인 블루 vs 황금 프리저와 프리저의 최후
절정의 대결은 힘의 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한다. 프리저는 시작부터 최종 형태로 변신하지만 초사이어인 갓의 힘을 얻은 손오공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손오공이 초사이어인 갓의 힘을 몸에 익힌 새로운 경지—푸른 머리칼의 '초사이어인 갓 슈퍼 사이어인', 통칭 초사이어인 블루—로 변신하자, 프리저 역시 자신의 새 형태인 '황금 프리저(골든 프리저)'로 응수한다. 잠시 프리저가 우위를 점하는 듯 보이지만, 손오공과 베지터는 곧 그 황금 형태가 프리저의 미숙함 탓에 급격히 힘을 소모한다는 약점을 간파한다. 갓 태어난 힘을 다스릴 시간이 없었던 프리저의 스태미나가 바닥나면서 전세는 역전된다.
그러나 이 막의 가장 뼈아픈 대목은 결말의 반전에 있다. 궁지에 몰린 프리저는 자신을 압도한 베지터에게 굴욕을 느끼고, 정정당당한 패배를 받아들이는 대신 비겁하게 지구 자체를 에너지 탄으로 파괴해 버린다. 지구는 폭발하고 베지터를 비롯한 대다수가 목숨을 잃는다. 이는 폭군 프리저의 본질—결코 변하지 않는 잔혹함과 파괴 본능—을 잔인하게 확인시키는 장면이다. 위기의 순간을 구원하는 것은 다시 위스다. 그는 자신이 시간을 최대 3분까지 되돌릴 수 있음을 밝히고 실제로 시간을 역행시켜, 지구가 파괴되기 직전으로 상황을 되돌린다. 되살아난 손오공은 이번엔 방심하지 않고 에네르기파(카메하메파)로 프리저를 완전히 소멸시킨다. 다만 정작 결정타를 손오공이 가로챈 데 대해 베지터가 분개하는 마무리는, 두 사이어인의 오랜 라이벌 의식과 훗날 「슈퍼」로 이어질 관계의 긴장을 예고한다.
신극장판기의 역사적 의의와 슈퍼로의 연결
이 신극장판기가 전체 서사에서 갖는 의미는 지대하다. 첫째, '신의 영역'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힘의 좌표계와 다중우주적 세계관의 씨앗을 심었다. 파괴신·천사·초사이어인 갓·초사이어인 블루라는 개념은 이 두 편에서 처음 제시되어, 이후 「드래곤볼 슈퍼」에서 여러 우주가 격돌하는 대서사의 근간이 된다. 둘째, 앞 막들과의 연결과 회수를 명확히 한다. 「신들의 전쟁」은 마인부우편 이후의 평화기를 정사로 이어받았고, 「부활의 F」는 「Z 프리저편」의 원점 악당을 다시 불러내 과거를 정산함으로써, 흩어져 있던 극장판 전통을 본편 연대기 안으로 통합했다. 셋째, 원작자 토리야마의 창작 의욕을 되살렸다는 프랜차이즈적 의의가 크다. 「신들의 전쟁」은 17년 만의 극장 신작으로서 일본 박스오피스 1위, 첫 이틀 56만 장 이상의 티켓 판매, 최종 30억 엔대의 흥행을 기록하며 상업적·비평적으로 성공했고, 실사 영화의 실패로 흔들리던 브랜드를 단숨에 현대 애니메이션 시장에 되돌려 놓았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토리야마 본인이 자신이 사랑했던 세계관의 매력을 재발견하며 '더 이야기하고 싶다'는 열망을 되찾았고, 그것이 곧 2015년 이후 다중우주 시대를 여는 TV 시리즈 「드래곤볼 슈퍼」로 직결된다. 요컨대 이 막은 원작 이후 멈춰 있던 이야기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한 '부활의 서곡'이자, 다음 막인 「슈퍼 — 다중우주 시대」로 향하는 관문이었다.
9
슈퍼 — 다중우주 시대
2015~2018
슈퍼의 두 축: 신들의 영역과 다중우주
「드래곤볼 슈퍼」는 원작 만화의 마인부우편 결말 이후, 오랜 공백을 지나 텔레비전 시리즈로 이야기를 이어받은 막이다.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후지 TV에서 전 131화가 방영되었고,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스토리 원안으로 직접 관여했다. 이 막의 핵심은 '신들의 영역'과 '다중우주'라는 두 축이다. 앞의 신극장판 시기(「신들의 전쟁」·「부활의 F」)에서 파괴신과 초사이어인 갓이라는 개념으로 세계관을 하늘 위로 끌어올렸다면, 슈퍼 TV 시리즈는 그 하늘을 열두 개의 우주로 넓혀 지구·은하 규모였던 싸움을 '우주 전체의 존폐'가 걸린 규모로 다시 한 번 확장한다. 이 막은 크게 다섯 개의 에피소드 군집 — 신들의 전쟁(파괴신 비루스)편, 골든 프리저편, 제6우주편, 미래 트랭크스편, 그리고 마지막 우주 서바이벌(힘의 대회)편 — 으로 흐르며, 각 편이 앞 편의 여운을 밟고 다음 편으로 규모와 주제를 키워가는 상승 구조를 이룬다.
신들의 전쟁편: 파괴신 비루스와 초사이어인 갓의 탄생
막의 발단은 신들의 전쟁편이다. 마인부우와의 결전 이후 오랜 평화를 누리던 지구에, 우주의 균형을 관장하는 파괴신 비루스가 잠에서 깨어난다. 비루스는 39년 전 예언의 물고기가 예고한 '초사이어인 갓'이라는 존재를 꿈에서 보고, 그 강자를 찾아 손오공 앞에 나타난다. 처음 비루스에게 손도 대지 못한 오공은 절망하지만, 신룡을 소환해 초사이어인 갓이 '순수한 마음을 지닌 다섯 사이어인이 여섯 번째 사이어인에게 마음을 모아 주는 의식'으로 탄생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구에 사이어인이 다섯뿐이라 의식이 성립되지 않을 뻔하지만, 비델의 뱃속 아이(팬)가 여섯 번째로 헤아려지며 의식이 완성되어 오공은 초사이어인 갓이 된다. 이 편은 단순한 힘겨루기를 넘어, '싸움 그 자체를 즐길 상대'를 찾던 비루스와 오공이 서로에게 흥미를 느끼며 적대가 아닌 기묘한 사제·라이벌 관계로 이어지는 전환점이다. 비루스의 스승이자 시종인 위스가 사실 비루스보다 강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위에는 늘 더 위가 있다'는 이 막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처음 제시된다.
골든 프리저편: 과거의 원수와 초사이어인 블루의 완성
이어지는 골든 프리저편에서 이야기는 과거의 원수를 다시 불러온다. 프리저의 잔당 소르베가 지구에서 드래곤볼로 프리저를 부활시키고, 되살아난 프리저는 사이어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4개월간 처음으로 진지하게 수행해 '골든 프리저'라는 새로운 형태에 도달한다. 이에 맞서 오공과 베지터는 비루스·위스에게 사사받아 초사이어인 갓을 넘어선 '초사이어인 갓 초사이어인'(통칭 초사이어인 블루)을 완성해 대응한다. 이 편은 오공의 방심이 부른 위기(소르베의 저격)와 베지터의 냉정한 마무리, 그리고 미래 트랭크스편의 회귀 전개(피콜로의 활약과 오공의 재기)로 마무리되며, '숙적조차 성장의 발판이 된다'는 소년만화적 순환을 다시 확인시킨다. 여기까지가 앞선 두 신극장판을 TV 판으로 재구성하며 워밍업하는 구간이라면, 진짜 '다중우주 시대'의 문은 다음 편에서 열린다.
제6우주편: 다중우주 세계관의 개막과 최강의 라이벌 힛토
제6우주편은 이 막에서 세계관을 결정적으로 확장하는 분기점이다. 제7우주 파괴신 비루스에게 쌍둥이 형제인 제6우주의 파괴신 샴파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두 파괴신은 지구의 '요리'를 걸고 다섯 대 다섯 무술대회를 벌인다. 이 대회를 통해 관객은 우주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며, 각 우주마다 파괴신과 계왕신, 그리고 강자들이 존재한다는 세계관을 처음 체감한다. 제6우주 팀에는 사이어인 청년 캐벗, 프리저와 같은 종족인 프로스트, 그리고 이 막이 낳은 최고의 라이벌 캐릭터 '힛토'가 등장한다. 캐벗은 자신을 초사이어인으로 각성시키기 위해 베지터가 일부러 옛 우주 해적 시절의 잔혹함을 연기하며 그의 고향과 가족을 몰살하겠다고 위협하자, 분노로 각성해 초사이어인이 된다. 베지터는 이후 그에게 사이어인의 긍지를 전하는 스승 같은 위치에 서며, 한때 파괴자였던 자신이 다른 우주의 젊은 사이어인을 이끄는 존재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프로스트는 프리저를 닮았으되 '독침'으로 승부를 조작하는 비겁함을 드러내 대조를 이룬다. 시간 도약(타임 스킵)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일순 멈추는 암살자 힛토는 오공과 대회 내내 실력을 겨루며, 서로 싸우는 동안 성장한다는 이 막의 핵심 모티프를 가장 선명하게 구현한다. 대회는 표면적으로 요리를 건 가벼운 판이지만, 실은 초우주 드래곤볼과 우주의 자존심이 걸린 큰판이며, 마지막에 힛토가 오공에 대한 존중으로 약자 모나카의 주먹을 일부러 맞고 스스로 링 밖으로 몸을 던져 제7우주에 승리를 넘기는 대목은 무인의 미학을 압축한다. 이때 등장한 시간의 반지·전왕(제노)의 존재는 이후 미래 트랭크스편과 힘의 대회로 이어지는 결정적 복선이 된다.
미래 트랭크스편: 신의 정의가 폭주할 때의 공포
미래 트랭크스편은 이 막에서 가장 어둡고 비극적인 장이다. 트랭크스편이라는 이름처럼, 인조인간·셀편에서 미래를 구했던 미래 트랭크스가 다시 폐허가 된 자신의 시간대에서 찾아온다. 그의 세계를 짓밟는 적은 오공과 똑같은 얼굴을 한 '고쿠 블랙'. 정체는 제10우주 계왕신의 제자였던 카이, 자마스다. 자마스는 인간(필멸자)의 오만과 야만을 혐오해 '필멸자 없는 완벽한 세계'를 꿈꾸는 극단적 정의감의 소유자로, 초시공 시간의 반지를 훔쳐 오공의 몸을 강탈하고(고쿠 블랙), 다른 시간대의 자기 자신과 합체해 '합체 자마스'라는 불사에 가까운 존재가 된다. 이 편의 핵심 정서는 '신의 정의가 폭주할 때의 공포'다. 자마스는 악당이라기보다 왜곡된 신념의 화신으로, 오공이라는 필멸자가 신의 영역을 넘보는 것에 대한 신 쪽의 반발을 상징한다. 오공과 베지터는 초사이어인 블루로 맞서지만 불사의 자마스에게 고전하고, 미래 트랭크스는 동료들의 기(氣)를 모아 '희망의 검(정신의 검)'을 만들어 거대화한 자마스를 베어낸다. 그러나 자마스의 증오는 육체를 넘어 시간대 전체에 스며들어 그 세계의 모든 생명을 앗아가고, 오공은 힘의 대회 복선으로 받아 두었던 '전왕 호출 버튼'을 눌러 미래의 전왕(제노)을 부른다. 미래 전왕은 자마스를 소멸시키기 위해 그가 오염시킨 미래 시간대 우주 전체를 지워버리고, 결국 그 세계에서는 미래 트랭크스와 미래 마이, 미래 전왕만이 살아남는다. 자신의 세계를 두 번 구하려 했으나 결국 세계 자체가 사라지는 결말은 이 막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이며, 트랭크스는 파괴된 미래 대신 과거(현재) 시간대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로 하며 떠난다. '신의 힘을 다루는 자의 책임'과 '시간을 건드리는 일의 대가'라는 주제는 다음 편의 우주 존폐 게임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힘의 대회: 다중우주의 존폐를 건 배틀로얄
막의 절정이자 결말은 우주 서바이벌편, 곧 '힘의 대회'다. 두 전왕(현재의 제노와 미래의 제노)은 열두 우주 가운데 격이 낮은 우주들을 정리하기 위해, 여덟 우주의 최강 전사 열 명씩을 모아 배틀로얄 형식의 대회를 연다. 규칙은 잔혹하다. 패배해 전원 탈락한 우주는 존재 자체가 소멸된다. 오공은 처음 이 규칙의 무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강자와 싸울 기대에 대회를 촉발시키지만, 곧 자신의 선택이 무수한 생명의 존폐를 건 것임을 자각하고 책임을 짊어진다. 제7우주 팀은 오공·베지터·손오반·피콜로·크리링·18호·17호·천진반·마스터 로시, 그리고 한때 우주의 폭군이었던 프리저까지 규합한 이색적 연합이다. 여기서 이 막은 세대와 노선이 다른 인물들에게 고루 조명을 나눠준다. 마스터 로시는 노쇠한 몸으로 한계를 돌파하며 무인의 근성을 보여주고, 크리링과 천진반 같은 인간 전사들은 신의 영역과 무관하게 '한 명 몫'을 해낸다. 손오반은 리더로서 팀을 조율하고, 17호는 조용한 실력자로 대회 내내 살아남는다. 프리저는 완전한 개심이 아니라 '자기 이익과 재부활'이라는 계산속에서 협력하지만, 결과적으로 팀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며 숙적과 등을 맞대는 아이러니를 완성한다.
지렌과 자아극의: 힘만이 진실인가 유대인가
대회의 최대 벽은 제11우주의 절대강자 '지렌'이다. 프라이드 트루퍼스(정의의 히어로 집단)의 일원인 지렌은 파괴신조차 능가하는 순수한 힘의 화신으로, 처음엔 대회에 무관심한 채 명상만 하다가 초우주 드래곤볼의 소원을 걸고 참전한다. 지렌은 압도적인 힘 앞에 무릎 꿇었던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동료도 감정도 필요 없다, 오직 힘만이 진실'이라는 신념을 지닌 인물로, 유대와 성장을 믿는 오공과 정면으로 대비된다. 오공은 지렌과의 싸움에서 극한으로 몰린 끝에, 자아극의(신, 즉 울트라 인스팅트/자율신경 전투)의 문을 연다. 마음을 비우고 몸이 스스로 반응하게 하는 이 신의 경지는 처음엔 불완전한 '자아극의 -징조-'로 발현되어 순간적으로만 유지되지만, 이 막을 대표하는 명장면이자 시리즈의 새로운 상징이 된다. 대회가 진행되며 제2·3·4·6·9·10·11우주가 차례로 소멸하고, 캐벗과 힛토가 속한 제6우주마저 지워지는 등 규모의 비정함이 강조된다. 베지터는 트랭크스에게 물려주었던 각오와 사이어인의 긍지를 걸고 마지막까지 버티다, '파이널 익스플로전'으로 제11우주의 토포를 밀어내는 등 자기희생적 투혼을 보인다.
최종 국면: 이타적 소원이 모든 우주를 구한다
최종 국면은 원작 나메크성의 구도를 의도적으로 반복한다. 만신창이가 된 오공과 프리저가 힘을 합쳐 지렌을 링 끝으로 몰아붙이고, 두 사람은 스스로 함께 링 밖으로 떨어지며 지렌을 탈락시킨다. 한때 나메크성에서 서로를 죽이려던 오공과 프리저가 등을 맞대고 우주를 구하는 이 장면은, '숙적조차 하나의 목적 앞에 손을 잡는다'는 이 막의 화해적 정서를 정점에서 폭발시킨다. 그 결과 마지막까지 링에 남은 이는 뜻밖에도 17호였고, 제7우주가 힘의 대회의 최종 승자가 된다. 소원을 얻은 17호는 자신의 이익 대신, 지워진 모든 우주와 그 안의 생명을 되살리는 소원을 빈다. 처음 존폐를 건 잔혹한 게임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결국 '한 사람의 이타적 선택이 모든 우주를 구원한다'는 결말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는 이 막이 규모만 키운 것이 아니라, 소년만화가 지켜온 '유대·희생·구원'의 가치를 우주적 스케일로 재확인했음을 보여준다.
슈퍼의 유산: 규모의 폭주 속에서도 심장을 놓치지 않다
이 막은 앞의 신극장판기(신들의 영역 도입)를 정식 TV 서사로 흡수해 확장하고, 뒤의 슈퍼 히어로기(브로리 세계관 편입, 극장판 중심)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파괴신·천사·전왕이라는 신의 위계, 열두 우주라는 다중우주 지도, 초사이어인 블루와 자아극의라는 새 경지, 그리고 힛토·자마스·지렌이라는 강렬한 신규 라이벌군은 모두 이 막에서 처음 정립되어 이후 프랜차이즈의 자산이 되었다. 특히 자마스의 '신의 정의'와 지렌의 '힘만이 진실'이라는 대립각은, 오공이 대표하는 '즐기며 강해지고 유대로 이긴다'는 노선을 반박·시험하는 안티테제로 기능하며 서사에 사상적 깊이를 더했다. 밝은 모험담(소년편)에서 출생의 비밀과 우주적 싸움(사이어인·프리저편), 세대교체(셀편), 원작의 마무리(마인부우편)를 거쳐 온 이 시리즈는, 슈퍼의 다중우주 시대에 이르러 '싸움의 무대'를 상상 가능한 최대치인 우주 전체의 존폐로까지 끌어올리며 하나의 정점을 찍는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남는 것이 압도적인 힘이 아니라 한 인물의 이타적 소원이라는 점에서, 이 막은 규모의 폭주 속에서도 시리즈의 심장을 놓치지 않은 장으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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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히어로기 — 새로운 세대의 극장판
2018~2022
극장판으로의 무대 전환—사이어인의 뿌리와 새로운 세대
「드래곤볼 슈퍼」 TV 시리즈의 힘의 대회(우주 서바이벌편)가 끝난 뒤, 프랜차이즈는 TV에서 극장판으로 무대를 옮긴다. 앞선 '슈퍼 — 다중우주 시대'가 여러 우주가 격돌하는 최대 규모의 서사로 시리즈의 상한을 끌어올렸다면, 이 마지막 막은 방향을 바꿔 '사이어인이란 무엇인가'라는 뿌리로 되돌아가고(브로리), 이어 오랫동안 그늘에 있던 조연들에게 무대를 넘겨주는(슈퍼 히어로) 두 편의 극장판으로 구성된다. 두 작품 모두 원작자 토리야마 아키라가 스토리와 원안에 깊이 관여했고, 이를 통해 과거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영화나 GT에서 다뤄지던 캐릭터·설정이 정식 세계관(캐넌)으로 편입된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정리와 계승'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브로리의 재해석—전설의 사이어인의 캐넌화
첫 번째 축인 「드래곤볼 슈퍼: 브로리」(2018)는 제목 그대로 '전설의 사이어인' 브로리의 재해석이 핵심이다. 브로리는 본래 1990년대 극장판 3부작(전설의 슈퍼 사이어인·위험한 콤비·바이오 브로리)에서 등장했으나 원작과 무관한 외전 캐릭터였는데, 이 영화가 그를 처음으로 본편 연속성 안으로 끌어들인다. 영화는 서두를 사이어인의 역사 그 자체로 채운다. Age 732, 우주의 지배자 콜드 대왕은 사이어인들에게 이제부터 아들 프리저를 섬기라 통보하고, 사이어인의 왕 베지터 왕은 엘리트만 들어갈 수 있는 육아 캡슐 구역에서 평민 출신인데도 비정상적으로 높은 전투력을 타고난 아기 '브로리'를 발견한다. 자신의 아들(어린 베지터 왕자)보다 잠재력이 큰 이 아기를 왕은 위협으로 여겨 황량하고 위험한 변경 행성 밤파로 추방해 버린다. 브로리의 아버지이자 사이어인 군의 장교였던 파라거스는 왕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복하고, 함선을 훔쳐 아들을 뒤쫓아 밤파로 향하지만 서두르다 불시착한다. 파라거스는 그 척박한 별에서 아들을 거두어 '브로리'라 이름 짓고, 언젠가 베지터를 쓰러뜨리는 최강의 전사로 키우겠다는 집념 하나로 아이를 혹독하게 단련시킨다. 이 부성애는 처음부터 순수한 사랑이라기보다 왕가에 대한 복수심과 뒤엉킨 것이며, 이 뒤틀림이 훗날 비극의 씨앗이 된다.
사이어인 멸망과 손오공의 출생—캐넌으로 정착된 비화
이 프롤로그는 동시에 손오공(카카로트)의 출생 비화를 캐넌으로 확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급 전사 바독은 임무를 마치고 행성 베지터로 돌아와 아내 기네와 함께 갓난 아들 카카로트를 걱정한다. '초사이어인이 자신을 쓰러뜨릴 것'이라는 예언에 불안을 느낀 프리저가 사이어인 말살을 결심하리라는 불길한 예감 속에서, 바독과 기네는 아들을 지키기 위해 카카로트를 서둘러 지구로 보낸다. 곧이어 프리저가 행성 베지터를 향해 거대한 에너지구를 쏘아 별과 사이어인 대부분을 몰살하고, 바독 역시 그 속에서 스러진다. 이렇게 브로리·베지터(왕자)·카카로트(오공) 세 사이어인은 같은 종족의 파멸이라는 하나의 사건에서 갈라져 나와 각기 전혀 다른 운명을 걷게 된다. 밤파에 버려져 야생에서 자란 자, 정복 종족의 마지막 왕자로 살아남은 자, 지구에서 인간으로 자라난 자 — 이 대비 구도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다.
브로리의 각성—분노의 임계점을 넘다
현재 시점으로 넘어오면, 프리저는 부활한 뒤에도 여전히 불사의 삶과 세력 확장을 노린다. 그의 부하 정찰병 치라이와 레모는 임무 중 한쪽 눈이 먼 늙은 파라거스와, 성인이 된 거구의 브로리를 발견한다. 두 사람은 이 엄청난 힘을 지닌 브로리를 프리저 군에 데려가면 좋아하리라 판단해 그를 데려오지만, 밤파에서 짐승처럼 자란 브로리는 사회성이 결여된 채 아버지의 통제 장치(목의 링)에 의해 힘을 억눌린 상태다. 치라이는 순박하면서도 폭발적인 브로리에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고, 늘 억눌린 그를 유일하게 따뜻하게 대해 준다. 반면 프리저는 브로리를 도구로만 본다. 브로리가 진정한 힘을 각성하도록 '스위치'를 켜기 위해, 프리저는 파라거스를 몰래 살해하고 마치 오공·베지터의 유탄에 맞아 죽은 것처럼 꾸민다. 유일한 혈육이자 세계 전부였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 브로리의 분노가 임계를 넘고, 억눌려 있던 사이어인의 광기가 완전히 폭발하며 그는 진짜 초사이어인(전설의 사이어인) 상태로 각성한다.
무의 격투와 퓨전—두 왕자의 협력
여기서부터 영화의 절정은 사실상 끊임없는 3인의 격투다. 오공과 베지터는 처음엔 낯선 사이어인 브로리와 대치하지만, 싸울수록 그의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며 압도당하기 시작한다. 브로리는 대화나 협상이 통하지 않고, 오직 상실의 분노로 불타는 순수한 파괴 그 자체다. 오공은 이 힘에 맞서 오랜만에 온 힘을 끌어내고, 베지터 역시 왕자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싸우지만 두 사람 각각으로는 브로리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두 사람은 최후의 수단으로 퓨전을 선택한다. 흥미롭게도 여기서 쓰이는 것은 포타라 귀걸이가 아니라 몸동작을 맞추는 '퓨전 댄스'다(이 장면은 이후 브로리 세계관과 GT·Z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등장했던 고제타·베지트의 계보를 정리하는 의미를 갖는다). 두 사람은 위스가 지켜보는 앞에서 춤을 실수해 뚱뚱하거나 비쩍 마른 실패작(베쿠)을 만들어 내며 두 번 실패하지만, 세 번째에 마침내 완벽히 합체해 고제타로 탄생한다. 고제타는 브로리와 대등 이상의 힘으로 격돌하고, 마침내 카메하메파 계열의 필살기로 브로리를 소멸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구원의 손길—화해의 가능성
그러나 이 영화의 결말은 승패의 통쾌함보다 '구원'에 방점을 찍는다. 그 사이 치라이와 레모는 프리저가 불사의 소원을 빌려고 모아둔 드래곤볼을 몰래 빼돌려 신룡을 소환한다(덴데에 의해 업그레이드된 신룡은 원래 여러 소원을 들어줄 수 있지만, 이 장면에서는 하나만 이뤄주고 사라진다). 치라이는 자신의 소원으로 '브로리를 무사히 고향(밤파)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빈다. 신룡이 소멸 직전의 브로리를 전장에서 빼내 밤파로 순간 이동시키면서, 브로리는 목숨을 건진다. 싸움이 끝난 뒤 오공은 손수 밤파로 찾아온다. 그는 브로리를 적으로 처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르마가 만든 캡슐(집·식량 등이 담긴)을 건네 치라이·레모·브로리가 살아갈 터전을 마련해 주고, 브로리에게 '서로 배울 것이 많으니 언젠가 함께 수련하자'고 손을 내민다. 종족을 멸망으로 몰아넣은 증오의 연쇄가 오공의 손끝에서 처음으로 화해의 가능성으로 바뀌는 순간이며, 이는 '사이어인=정복 종족'이라는 원죄를 오공 세대가 다르게 다시 쓴다는 이 막의 주제를 압축한다.
조연의 부활—세대교체의 시작
이 막의 두 번째 축인 「드래곤볼 슈퍼: 슈퍼 히어로」(2022)는 방향을 크게 튼다. 「브로리」가 오공과 베지터, 사이어인의 뿌리에 집중했다면, 「슈퍼 히어로」는 의도적으로 두 주인공을 무대 밖으로 잠시 밀어낸다. 오공·베지터·브로리는 위스의 지도 아래 비루스의 행성에서 수련 중이라 지구를 비우고, 대신 오랫동안 조연으로 물러나 있던 피콜로와 손오반이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이 구도 자체가 '세대교체'와 '잊힌 잠재력의 재점화'라는 주제를 선언한다. 피콜로는 딸(판)을 키우며 전사로서의 날을 무디게 놔둔 오반이 재능을 낭비하는 것을 못마땅해하고, 오반은 학자로서의 삶에 안주해 한때 셀을 쓰러뜨린 아이의 분노와 힘을 봉인해 둔 상태다.
레드리본군의 부활—과거의 악이 현재를 흔들다
위협은 과거로부터 되살아난다. 오공이 어린 시절 무너뜨렸던 악의 조직 레드리본군이, 창설자 레드 총수의 아들인 마젠타(레드 제약의 CEO)에 의해 비밀리에 부활한다. 마젠타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오공 일행에 복수하려 하고, 이를 위해 천재 과학자 닥터 게로의 손자인 젊은 천재 닥터 헤도를 끌어들인다. 마젠타는 헤도에게 '오공 일행은 지구를 노리는 위험한 외계인 악당'이라고 거짓으로 세뇌해, 정의를 꿈꾸는 순진한 그가 자신도 모르게 악의 병기를 만들게 만든다. 헤도는 '슈퍼 히어로'를 동경하는 인물답게 인조인간 감마 1호·2호를 만들어 캡슐 코퍼레이션과 그 초인 동료들을 제압하려 하고, 마젠타의 압박에 마지못해 할아버지 게로가 남긴 셀의 설계도를 개량해 더 강력한 '셀 맥스'까지 만들어낸다. 이렇게 이 영화는 '드래곤볼 최초의 악당'인 레드리본군과 'Z 최고 인기 빌런'인 셀을 동시에 소환하며 프랜차이즈의 과거를 현재로 끌어온다.
최종 대전—잠재력의 각성과 구원의 완성
피콜로는 감마 2호의 습격을 받지만 그를 따돌리고 뒤를 밟아 레드리본군의 기지를 알아낸다. 그는 병사로 위장 잠입해 회의를 엿듣고, 감마들이 캡슐 코퍼레이션과 그 조력자들을 노린다는 것, 그리고 셀 맥스라는 개량 병기의 존재를 파악한다. 이어 피콜로는 적의 계략(오반을 유인하기 위해 손녀 판을 납치하려는 마젠타의 음모)을 역이용하기로 한다. 그는 스스로 판의 '납치범' 역할을 자처하고, 학교를 마친 판에게 상황을 미리 귀띔해 연기를 시킨 뒤, 판이 위험에 처한 것처럼 꾸며 오반을 자극한다. 딸이 납치됐다는 소식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오반의 분노가 마침내 임계를 넘고, 그는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해 레드리본 기지로 전면 돌격한다. 이 전개는 명백히 앞 막들의 복선 회수다 — 오반이 처음 초사이어인 2에 각성했던 셀 게임 때처럼, 그의 힘은 냉정한 수련이 아니라 소중한 존재를 지키려는 순수한 분노에서 터져 나온다는 캐릭터의 본질이 다시 확인된다.
전장에서 피콜로는 자신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신룡의 힘까지 빌린다. 앞서 드래곤볼로 소원을 빌 때 신룡이 그의 잠재력을 완전히 개방해 주는데(신룡이 '조금 더 얹어 줬다'고 너스레를 떠는 코믹한 연출과, 부르마가 남은 소원을 미용에 써 버리는 개그가 함께 배치된다), 이 각성이 결정적 순간 거대한 오렌지빛 몸으로 변신하는 '오렌지 피콜로' 형태로 발현된다. 피콜로가 감마 2호를 상대하는 사이, 오반은 감마 1호를 제압하기 위해 예전의 '얼티밋(잠재능력 해방)' 형태로 변신한다. 그러나 진짜 위협은 그 다음이다.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기 시작한 셀 맥스가 봉인에서 깨어나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모두를 위협하고, 피콜로·오반은 물론 뒤늦게 합류한 크리링·18호·감마들까지 총력전을 벌여도 좀처럼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만든 헤도조차 통제 불능이 된 셀 맥스에 경악하며, 결국 그는 정의를 오판했음을 깨닫고 오반 진영에 협력하게 된다. 감마 2호는 동료(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고, 이 희생은 인조인간도 마음과 정의를 가질 수 있다는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못박는다.
절정은 셀 맥스에게 치명타를 입고 쓰러진 피콜로의 모습에서 온다. 스승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인 피콜로가 죽은 듯 쓰러진 것을 목격한 순간, 오반의 억눌린 분노와 절망이 다시 한번 임계를 넘으며 그는 완전히 새로운 경지, '수인(獸人) 오반(Gohan Beast)' 형태로 각성한다. 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압도적인 힘을 얻은 오반은 이 형태로 셀 맥스를 정면에서 압도하고, 마지막에는 오렌지 피콜로가 만들어 준 결정적 기회를 살려 특대의 마광포 계열 필살기로 셀 맥스를 소멸시킨다. 셀 게임 이후 오랫동안 '재능을 낭비하는 어른'으로 그려졌던 오반이, 아이 때 자신을 정의로 이끈 '분노'라는 본질을 되찾아 마침내 완전한 잠재력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이 각성은 그의 캐릭터 아크의 정점이자 회수다. 싸움이 끝난 뒤 피콜로는 무사히 되살아나고, 세뇌에서 풀려난 헤도는 처벌 대신 캡슐 코퍼레이션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자신의 재능을 정의롭게 쓸 자리를 얻는다 — 이는 「브로리」의 결말에서 오공이 브로리에게 손을 내민 것과 같은, '적을 파괴하기보다 구원하고 품는다'는 이 막 전체의 일관된 태도다.
프랜차이즈의 정리와 계승—새 세대로의 토대
두 극장판을 함께 놓고 보면 이 마지막 막의 의미가 뚜렷해진다. 첫째, '캐넌 정비'다. 과거 애니메이션 오리지널로만 존재하던 브로리, GT나 외전에서 산발적으로 다뤄지던 고제타, 그리고 초기작의 악당 레드리본군과 셀이 모두 하나의 정식 세계관 안으로 정돈되어, 흩어져 있던 프랜차이즈의 유산이 재통합된다. 둘째, '세대교체와 잊힌 캐릭터의 부활'이다. 오공·베지터라는 두 축에 의존하던 서사를 잠시 내려놓고, 브로리·치라이 같은 완전히 새로운 인물과 피콜로·오반·판이라는 오래된 조연에게 무대를 넘겨줌으로써 세계관이 더 넓은 인물들로 지탱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셋째, '증오의 연쇄를 끊는 화해'라는 주제의 일관성이다. 사이어인의 원죄에서 시작된 브로리를 오공이 품고, 세뇌에 이용된 헤도를 오반 일행이 품는 결말은, 초기 소년편의 밝은 모험담에서 출발해 우주적 전쟁으로 확장됐던 이 시리즈가 결국 '적조차 이해하고 함께 나아간다'는 성숙한 지점에 도달했음을 보여 준다.
앞 막인 '슈퍼 — 다중우주 시대'가 규모의 확장을 통해 시리즈의 천장을 높였다면, 이 '슈퍼 히어로기'는 그 확장의 열기를 안으로 갈무리해 뿌리(사이어인의 기원)와 곁가지(조연들의 잠재력)를 함께 정리한 막이다. 그리고 이 시기가 남긴 오렌지 피콜로, 수인 오반, 정식 캐넌이 된 브로리·고제타 같은 새 자산들은 이후로도 계속되는 프랜차이즈(신작 시리즈·게임·후속 극장판)의 토대가 되며, '드래곤볼'이라는 세계가 원작자의 별세 이후에도 새로운 세대의 손과 관객에게로 계승될 발판을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