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가 비었는데, 극장은
합병으로 답했다
2025년 4분기 한국 영화의 가장 첨예한 장면은 스크린이 아니라 회의실에 있었다. 천만 영화가 사라진 자리에서, 업계 2·3위는 손을 잡는 것으로 시대의 종말을 인정했다.
2025년이 저물 무렵, 한국 영화계는 익숙한 연례행사 하나를 치르지 못했다. 천만 관객 영화의 부재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을 제외하면 2012년 이후 처음으로, 한 해 동안 단 한 편의 천만 영화도 나오지 않았다. 영화진흥위원회 결산에 따르면 2025년 한국영화 관객 수는 4,358만 명으로 전년 대비 39.0% 줄었고, 매출은 4,191억 원으로 39.4% 감소했다. 이는 팬데믹 기간을 빼면 각각 2005년과 2009년 이후 최저치다.
그러나 2025년 4분기를 진짜로 규정한 사건은 흥행표가 아니라 그 흥행표를 받아 든 사람들의 선택이었다. 왕좌가 비어 있는 동안, 업계 2위 롯데시네마와 3위 메가박스는 합병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이 한 수가 의미하는 바를 읽지 못하면, 우리는 위기의 표면만 보고 본질을 놓친다.
관객이 반토막 났다는 사실은 이제 새롭지 않다. 정작 주목할 것은 위기의 형태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전체 극장 매출은 1조 470억 원으로 2019년(약 1조 9,140억 원)의 절반 수준이지만, 외화와 특수상영관이 1조 원·관객 1억 명 선을 가까스로 떠받쳤다. 무너진 것은 시장 전체가 아니라 한국영화라는 특정 장르의 공급 체력이다.
숫자가 이를 증언한다. 연간 개봉 편수는 2019년 1,740편에서 2025년 585편으로 66% 줄었다. 5대 투자배급사가 한 해 내놓은 신작은 10~14편에 불과해, 2023~2024년의 3분의 1 수준이다. 2023년 상업영화 평균 투자 수익률은 -31%, 2024년 순제작비 30억 원 이상 작품 37편의 추정 수익률은 -16.4%였다. 만들수록 잃는 구조가 굳어지자, 자본은 영화를 만드는 대신 만들지 않는 쪽을 택했다. 천만 영화의 부재는 흥행의 실패가 아니라 도전 자체의 증발이다.
이 공백 위에서 4분기 내내 업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롯데컬처웍스와 메가박스중앙의 합병이었다. 5월 양해각서 체결 이후 공정거래위원회 사전협의가 이어졌으나, 합병 비율과 존속법인을 둘러싼 이견 속에 연내 성사는 끝내 불발됐다. 두 회사가 합쳐지면 스크린 점유율은 CGV 44.5% 대 합병법인 55.5%로, 20여 년간 굳건했던 멀티플렉스 1위 구도가 뒤집힌다.
하지만 점유율 역전이라는 자극적 헤드라인 뒤에는 더 서늘한 진실이 있다. 2024년 롯데컬처웍스와 메가박스중앙은 각각 511억, 520억 원의 순손실을 냈다. 양사 모두 폐점과 희망퇴직으로 체질을 깎아내던 중이었다. 그래서 이 합병은 시장을 키우려는 확장 전략이 아니라, 시장이 줄어드는 속도를 견디기 위한 생존 동맹에 가깝다. 한쪽에서는 사실상 경영권 매각이라는 해석까지 나왔다. 영토를 넓히는 결혼이 아니라, 함께 버티기 위한 동거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동거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한 전문가의 진단처럼 "2000년대 이후 이어진 극장 산업의 양적 팽창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스크린 수가 아니라 공간의 효율적 재편과 수익 모델의 다각화에서 갈린다. 같은 4분기, 롯데시네마가 전국 14개 상영관에서 관람료를 1,000~3,000원 할인하며 박리다매로 갔다면, CGV는 골드클래스를 리뉴얼하며 프리미엄 고급화로 갔다. 메가박스는 돌비 시네마 같은 특별관으로 4분기 30억 원의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같은 위기 앞에서 세 회사의 처방전이 완전히 갈렸다는 사실 자체가, 정답이 사라졌다는 증거다.
반론은 가능하다. 합병으로 출혈 경쟁을 멈추고 점포를 정리하면 산업의 체력은 오히려 회복될 수 있다. 다만 그 회복이 관객을 위한 것인지, 살아남은 사업자만을 위한 것인지는 전혀 다른 질문이다.
2025년 4분기 한국 영화 산업의 가장 첨예했던 장면은, 빈 왕좌를 두고 벌어진 흥행 다툼이 아니라 그 왕좌를 포기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었다. 천만 영화의 부재가 콘텐츠 공급의 붕괴를 드러냈다면, 끝내 매듭짓지 못한 합병은 그 붕괴를 받아들이는 산업의 자세를 드러냈다. 더 크게 만드는 대신, 더 작게 버티기로 한 것이다.
위기의 진짜 무게는 한 해 천만 영화가 없었다는 데 있지 않다. 천만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줄어든 구조가 고착되고, 그 구조 위에서 극장들이 확장이 아닌 통폐합을 미래로 그리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산업이 스스로의 축소를 전략으로 받아들인 순간, 한국 영화는 위기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동거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