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하지 않는 그룹이
가장 'K팝'다웠던 분기
2025년 4분기, K팝 산업 최대의 사건은 어떤 데뷔도 컴백도 아니었다. 가장 압도적인 'K팝'은 끝내 실존하지 않는 그룹의 것이었고, 그 사실이 업계의 가장 불편한 거울이 되었다.
2025년의 마지막 분기를 결산할 때, 산업이 가장 먼저 떠올려야 할 이름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속 가상의 걸그룹 헌트릭스(Huntrix)다. 4분기 내내 K팝이라는 단어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소비된 무대는 음악방송도, 돔 투어도 아닌 한 편의 영화였다.
수치가 그 비대칭을 증언한다.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12월 말까지 누적 5억 회 이상 재생되며 넷플릭스 최다 시청 기록을 갈아치웠고, 사운드트랙은 10월 미국 RIAA 더블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 빌보드 핫100 톱10에 사운드트랙 네 곡을 동시에 올린 것은 영화 음악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작 같은 분기, 실재하는 한국 아이돌 산업의 지표는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2025년 톱400 음반 판매량은 약 8,572만 장으로 전년 대비 7.5% 감소했다. 100만 장을 넘긴 앨범은 18종으로 한 해 전보다 줄었고, 무엇보다 걸그룹의 후퇴가 뚜렷했다. 연간 밀리언셀러 여성 그룹은 10팀에서 6팀으로 반토막 났고, 상위권은 사실상 보이그룹 팬덤의 화력으로 채워졌다.
이것이 4분기 내내 한국 언론을 지배한 'K팝 위기론'의 실체다. 글로벌에서 장르는 팽창하는데 내수의 활력은 빠진다. 음반·음원 이용량은 동반 하락했고, 신인 팀이 시장에 안착하기는 해마다 더 어려워졌다. 빅4 바깥의 중소 기획사 걸그룹이 컴백 몇 주 만에 해체를 발표하는 풍경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었다.
업계가 찾은 출구는 '경험'이었다. 4분기 실적에서 음반·음원 매출이 빠진 자리를 콘서트가 메웠다. 하이브의 공연 매출은 전년 대비 세 배 가까이 뛰어 수천억 원대에 이르렀고, SM의 분기 공연 매출도 30%대 후반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팬은 더 이상 음반을 '소유'하기보다 무대를 '경험'하려 한다.
문제는 이 전환이 산업의 체질을 바꾼다는 데 있다. 음반·음원이 신인을 키우는 진입로였다면, 투어는 이미 검증된 대형 IP에만 보상을 몰아준다. 승자독식이 가속되고, 다음 세대가 자라날 토양은 그만큼 얇아진다. 4분기의 호실적 뒤에 가려진 것은 바로 이 구조적 빈혈이다.
물론 반론은 가능하다. 헌트릭스의 성공은 K팝의 패배가 아니라 K팝 '포맷'의 승리이며, 실존 아티스트가 만든 노래와 안무, 비주얼 문법이 없었다면 그 영화도 없었다는 것이다. 일리 있다. 그러나 그 논리는 오히려 핵심을 찌른다. 세계가 사랑한 것이 K팝의 형식이라면, 그 형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현한 주체가 살아 있는 인간 그룹이 아니라 비용도 스캔들도 군 공백도 없는 가상 캐릭터였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4분기에 벤처 자본이 '다음 데몬 헌터스'를 찾아 버추얼 아이돌 스타트업으로 몰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은 이미 답의 방향을 베팅하고 있었다.
2025년 4분기를 규정한 사건은 한 명의 아티스트나 한 건의 분쟁이 아니라, '가장 K팝다운 것이 실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가능성이 처음으로 산업 전체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내수는 정체하고, 신인의 입구는 좁아지고, 무게중심은 경험과 IP로 옮겨갔다.
이 분기가 던진 질문은 잔인할 만큼 단순하다. K팝이 끝내 사람이 아니라 형식을 파는 산업이 된다면, 우리가 그토록 아껴 온 것은 무대 위의 사람이었나, 아니면 그 사람을 닮은 완벽한 설계도였나. 2025년의 마지막 분기는, 답을 내리지 않은 채 그 질문만을 선명하게 남기고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