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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IAL · 2026-02
관점

창작자의 값을 매긴 법정
멀티레이블, 그 약속의 청구서

2026년 2월, 한 장의 1심 판결문이 케이팝 산업의 가장 깊은 균열을 드러냈다. 자본이 창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멀티레이블이라는 십년의 실험은 이제 법정에서 그 값을 정산받기 시작했다.

KONTENTS INDEX 편집부 · 읽기 4분
서론

2026년 2월 12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31부는 한 프로듀서가 자신이 키운 회사에 행사한 풋옵션을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판결의 숫자는 선명했다. 본인에게 약 255억 원, 동료 임직원 둘에게 각각 17억·14억 원, 합산 약 286억 원을 지급하라. 1심 원고 완승이었다.

하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금액이 아니다. 법원이 배척한 것은 모회사가 자회사 대표에게 들이댄 '경영권 탈취'라는 혐의 그 자체였다. 재판부는 수백억 원의 권리를 박탈하려면 중대하고 분명한 위반이 입증되어야 한다고 보았고, 그 입증은 없었다고 결론지었다. 케이팝이 십 년 동안 자랑해온 멀티레이블 시스템의 설계도가, 처음으로 법의 언어로 검증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멀티레이블이라는 약속, 그리고 그 이면

멀티레이블은 케이팝 산업이 규모와 창작을 동시에 쥐기 위해 고안한 절묘한 타협이었다. 거대 자본은 상장사의 안정성과 글로벌 유통망을 제공하고, 산하 레이블은 독립된 색깔과 창작의 자율을 보장받는다. 모회사는 지분 다수를, 창작 책임자는 풋옵션이라는 안전판을 갖는다. 서로 다른 두 욕망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는 구조였다.

문제는 이 동거가 평화로울 때만 작동한다는 데 있었다. 자회사의 아티스트 정체성과 모회사의 포트폴리오 전략이 충돌하는 순간, 자율은 통제와 부딪힌다. 산하 아티스트 보호를 위한 대표이사의 판단을 법원이 정당한 경영 판단의 범위로 인정한 이번 결론은, 역으로 그동안 자본이 창작 현장을 어디까지 통제하려 했는지를 드러낸다. 약속된 자율은 계약서의 잉크가 아니라, 분쟁이 터졌을 때 비로소 시험받는 가설이었던 셈이다.

창작자에게 매겨진 가격

이번 판결이 산업에 던진 가장 날카로운 질문은 이것이다. 프로듀서는 고용된 임원인가, 아니면 회사 가치의 공동 소유자인가. 법원은 후자에 무게를 실었다. 창작의 핵심 인물이 보유한 지분과 그 환매권을, 모회사의 일방적 의사로 무력화할 수 없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이는 케이팝이 오래 외면해온 모순을 정조준한다. 산업은 '프로듀서 IP'와 '아티스트 세계관'을 마케팅의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정작 그 가치를 만든 개인을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다뤄왔다. 286억이라는 숫자는 그 창작 노동에 처음으로 법적 가격표가 붙은 사건이다. 앞으로 모든 멀티레이블 계약은 이 판결을 의식하며 다시 쓰일 것이다. 누가 무엇을 소유하는가의 문제가, 더 이상 신뢰가 아니라 조항으로 적시되어야 하는 시대가 열렸다.

반론 — 자율의 비용은 누가 치르는가

물론 반론도 만만치 않다. 창작자의 손을 들어준 판결이 자칫 자회사 경영진의 독립 행보에 면죄부를 주어, 수천억을 투자한 모회사의 정당한 통제권과 주주 이익을 위협한다는 우려가 그것이다. 다만 이번 판단은 1심에 머물러 있고 항소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아직 산업의 표준이 아니라 표준을 향한 첫 발언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자율과 통제의 경계를 이제 시장의 관행이 아니라 법원이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케이팝의 다음 십 년은 이 경계선 위에서 설계될 것이다.

결론 — 시스템의 청구서가 도착했다

케이팝은 음반 100만 장의 시대를 지나 공연과 IP 중심의 체질 개선을 외치고 있다. 그러나 2026년 2월이 일러준 진실은 다르다.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기 전에, 그 모델을 굴리는 사람과 자본의 관계부터 다시 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멀티레이블은 창작과 자본의 행복한 결혼으로 포장됐지만, 결국 모든 결혼처럼 분쟁의 조건과 정산의 규칙을 동반한다. 이번 판결은 그 청구서의 첫 장이다. 케이팝이 글로벌 산업으로 한 단계 더 올라서려면, 화려한 무대만큼이나 그 무대 뒤의 계약과 신뢰를 단단히 다시 짜야 한다. 창작자의 값을 법정에서야 알게 된 산업에게, 2월의 판결문은 오래 미뤄둔 숙제를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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