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이 말을 하기 시작한 분기
케이팝, 자기 입으로 내부를 자백하다
2024년 4분기, 케이팝은 새 음악이 아니라 새 문서로 기억된다. 국정감사장에 오른 한 장의 내부 리포트와 한 그룹의 계약 해지 선언이, 산업이 그동안 입 밖에 내지 않던 작동 원리를 스스로 누설했다.
2024년 가을, 케이팝의 가장 큰 사건은 무대 위가 아니라 무대 뒤에서 터졌다. 10월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 대형 기획사의 내부 문서 '위클리 음악산업 리포트'가 공개됐다. 업계 동향 보고서를 표방한 그 문건에는 타사 아이돌의 외모를 품평하고, 미성년 멤버를 향해 성희롱에 가까운 표현을 쓰고, 경쟁사 대표까지 원색적으로 비방한 문장들이 담겨 있었다. 그런 평가가 회사 최고위층에게 회람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1월 28일, 한 인기 그룹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소속사와의 전속계약을 다음 날 자정부로 해지한다고 선언했다. '회사는 우리를 보호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 두 사건은 따로 일어났지만, 같은 것을 가리켰다. 케이팝이라는 정교한 산업이 마침내 자기 입으로 내부를 자백한 분기였다.
가장 손쉬운 해석은 '일부 임원의 일탈'이다. 문건 작성자는 곧 직위 해제됐고, 회사 대표는 닷새 만에 공식 사과문을 올렸다. 그러나 이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품성 문제였다면, 그 문서는 애초에 '리포트'라는 이름을 달 이유가 없었다. 외모와 '섹스 어필'을 항목화해 경쟁자를 평가하는 언어가 업무용 보고 양식 안에 자연스럽게 들어앉아 있었다는 것 — 그것이 진짜 폭로다.
케이팝은 지난 10여 년간 '시스템'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성장했다. 연습생 선발, 콘셉트 설계, 글로벌 동시 발매, 데이터 기반 모니터링까지 모든 공정이 표준화됐다. 문제는 그 표준화의 시선이 사람을 향할 때다. 동료 아티스트를 '견제 대상 상품'으로 환원해 외모를 등급화하는 문장은, 산업이 인간을 어떤 단위로 다루는지를 무심코 드러낸다. 한 사람의 취향이 아니라 한 산업의 문법이 거기 적혀 있었다.
11월 말의 계약 해지 회견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진실을 건드렸다. 아티스트들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보호받지 못했다'고 말한 순간, 케이팝의 오래된 전제 하나가 흔들렸다. 그동안 아이돌은 회사가 설계하고 회사가 발화하는 존재였다. 의사 결정의 주체가 아니라, 잘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국회 차원의 논의에서 아이돌 멤버들이 노동관계법상 '근로자'에 해당하지 않아 노동 보호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판단이 거론됐다. 상품으로 다뤄지되 노동자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자리 — 케이팝 종사자가 선 좌표가 그렇게 또렷해졌다. 한 멤버의 표현을 빌리면 '회사가 아티스트를 실제 인간이 아니라 상품으로 본다'는 구조적 문제. 4분기의 두 장면은 그 문장의 양면이었다.
물론 반론은 가능하다. 바로 그 시스템 덕분에 케이팝이 세계 시장에 올랐고, 표준화 없이는 이 규모의 산업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것 — 이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2024년의 숫자는 시스템 만능론에 균열을 낸다. 상위 400위 음반 누적 판매가 전년 대비 19.5% 줄고, 100만 장 이상 팔린 앨범이 33개에서 20개로 감소하며 약 10년 만에 처음으로 피지컬 음반 성장세가 꺾였다. 효율을 위해 밀어 올린 '앨범 밀어내기'와 그로 인한 플라스틱 폐기물 논란까지, 시스템의 미덕과 비용이 동시에 청구서로 돌아온 해였다.
2024년 4분기는 새로운 위기의 시작이 아니라, 오래 묵은 구조가 표면으로 떠오른 분기였다. 외모를 등급화한 내부 문서와 '보호받지 못했다'는 계약 해지 선언은 정반대편에서 같은 말을 했다. 케이팝은 사람을 상품으로 다루는 데는 더없이 능숙해졌지만, 그 상품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루는 법은 아직 배우지 못했다.
산업화는 케이팝의 성취이지 변명이 아니다. 다음 세대의 경쟁력은 더 빠른 공정이나 더 촘촘한 모니터링이 아니라, 자기 시스템을 향해 '이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기 인식에서 나올 것이다. 시스템이 입을 연 분기였다면, 이제 산업이 그 말을 알아들을 차례다.